금일 동선 해설(내 안의 또라이)
오산 강남역에 가는 버스에 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오, 자연의 부름이여. 순간 1994년 어느 봄날로 플래시백. 사당역 가는 버스에 첫 발을 올려놓는 순간, 오늘 느꼈던 바로 그 조짐을 느꼈지. 아, 그때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정말,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그 숭고한 의지 덕택이었다. 게다가 그날은 만원버스에, 서서 갔었지… 다시 왕복 네 시간 걸려서 통학하라면 대학에 가지 않는 길을 택할지도 모르겠다. 도착할때까지 안절부절.
판교 나들목 어귀 아저씨들이 꽃을 심는다. 무엇인가에 벽돌벽을 쌓아 가린다. 장학사님들이 곧 오시나봐요, 교장선생님.
강남교보 웬 건강빵 책이 이렇게 많냐? 빵이 언제부터 건강하지 않은 음식이 된 걸까? 빵이 죄가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 빵을 만든 사람들이 죄겠지… 쌀가루빵은 뭐고 포도씨 기름으로 만든 파이 크러스트는 대체 뭘까. 파이 크러스트에 왜 고체화된 지방을 쓰는지조차도 모르니까 액체 기름으로 만들어놓고 건강 베이킹이라고 하는 거다. 기본도 못 익혔는데 변주를 연습하는 셈인거지.
471번 버스 요즘 새로 나온 버스들은 맨 뒷좌석에서 일어섰을때 천장의 난간을 잡기 어렵게 되어있다. 난간이 뒷좌석 머리 위까지 뻗을 수 없는 구조라서.
명동성당 앞 바로 맞은 편에 아주 작은 교회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수십년을 다닌 길에서 새로운 발견.
명동 비첸향에서 육포를 손톱만하게 잘라서 시식하는데, 먹으려니 이미 벌떼같이 달라붙어 있는 아줌마들 때문에 버거웠다. 마지막 두 쪽이 남았는데, 내 앞에서 잽싸게 먹은 아줌마가 내 뒤의 일행에게 한 쪽을 찍어서 주려한다. 절대 그럴 수 없지, 나도 집에서는 밥하고 살림하는 아줌마거든. 한 쪽을 집고 아줌마가 이쑤시개를 뻗치는 그 밑으로 진입해서 두 쪽을 0.5초 사이에 한 이쑤시개에 꿰었다. 어이없으시겠지만 뭐 어쩌겠어요. 나도 다시 돌아와서 배운 게 다 그런 거라서. 달착지근한게 딱 쥐포맛이었다. 가격은 100그램에 9,800원. 곰소의 어머니 단골 건어물가게에 가면 조미료 안 넣은 것으로 아는 쥐포가 있는데, 그게 더 싸고 맛있을 것 같다.
중앙우체국 자기 홍보 문건을 택배로 보냈다. 어젯밤 갑자기 닥쳐오는 위기의식이 원동력이었다.
신세계 지난 주에 여섯 병 샀는데 눈에 띄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좌절했다 T_T 부르고뉴 한 병이 눈에 띄었으나 끝까지 참았다. 속으로 ‘있는 것부터 마셔 치워라’와 ‘기회 비용’을 마법주문처럼 외웠다.
롯데 롯데는 와인매장에 대한 개념부터 다시 세워야 할 것 같다. 며칠 전 온 세일 선전 팜플렛에서 대방출이니 뭐니 했는데, 가격도 다른 백화점 매장들에 비해 비싼 편,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몇몇 것들을 비교해보니 그랬다. 게다가 매장도 작고 마음에 드는 것도 없으며 직원들이 더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여기에서도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지만, ‘있는 것부터 마셔 치워라’,’기회 비용…’. 이 쓸데없는 물욕이며 집착은 평생 지고 가야할 나의 업보다.
프라자호텔 에릭 케세르에서 빵을 좀 샀다. 들고 가야할 데가 있어서. 보통 내가 구운 걸 가져가나 그럴 수가 없었다.
영풍가는 길 버스에서 내리는 아무개 1님과 우연히 마주쳤다. 이런 일이…
용봉 굴짬뽕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더라. 사람들이랑 코스 먹으러 가고 싶다. 무선인터넷도 되더라. 황@음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서 먹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그녀가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몬디에 이스파한을 다시 먹으러 갔다. 다들 장미향이 난다던데 나는 느낀바가 없어 확인하러 다시 갔다. 거의 안 나더라. 그 정도면 난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맛은 전보다 나았지만 식감은 오히려 더 못했다. 너무 딱딱했다.
합 새로 생긴 떡집. 남은 여섯 가지를 하나씩 다 샀다.
(이 부분은 사생활을 위해 생략)
상수역 커피 한 봉지를 샀다. 요즘 집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커피를 내려 마신다. 내 주전자는 정말 드립용 주전자에 비하면 석 자짜리 코를 가지고 있다.
(이 부분도 사생활을 위해 생략)
미술학원 밀집 지역 아무개 2님과 마주치다. 나는 단박에 알아봤는데 아무개님은 약간 긴가민가하셨던 듯. 반가웠습니다. 아무개 1님과 2님은 내 책을 사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쿡앤북 지난 번에 그 앞에서 포기했는데 완전 말도 안 되는 자리에 있었다. 사과와 고구마 “케이크”를 샀다. 좀 비싸다. 맛을 꼭 제대로 봐야 되겠다(여기에서 시간이 의외로 많이 걸렸다. 기차 시간 때문에 뛰기 시작한다).
홍대입구역 이 인파는 아무 이벤트도 없는데 몰리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뭔가가 있는가… 난 홍대입구역 앞 노점상들을 싫어한다.
전철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표를 샀는데, 신도림으로 내려가는 전철이 먼저 왔다. 그걸 타고 갈아타서 영등포로 가면 훨씬 느긋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게 훨씬 더 이성적인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보내고 시청쪽으로 가는 걸 탄다. 20분 남았다. 속이 타기 시작한다. 모든 상황을 이성적으로 분석해서 뭐가 맞는지 알아도 때로 사람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말도 안되는 근거를 삼아 내린다. 누군가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고 노래했던가? 내 안에는 또라이가 들어있다. 말도 안되는 결정의 말도 안 되는 근거는 ‘그래도 서울역이 출발점이니까 기차는 거기에서 타야 제맛이지.’ 나 자신에게 할 말을 잃어서 지하철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30초마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청역 뛴다. 시청역 환승은 정말 빡세다. 올라갔다가 또 내려가야만 한다. 바로 지하철이 들어오는데 다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서울역 계속 뛴다. 에스컬레이터에 사람이 많다. 열차 출발 3분전. 목이 바싹 말라있다.
기차 안 3호차에서 4호차 넘어가는 길에 화장실에 들르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님이 늦게 나오신다. 서 있는데 등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오랜 기다림끝에 님이 나오신다. 자리에 앉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창밖으로 한강이 뿌연데 헤드라이트만 반짝거린다. “출입구의 노란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주세요. 정시 운행이 목표입니다!”가 30초에 한 번씩.
안양에서 수원 사이 어딘가 1,800번에 쓸 글을 위해 섀도우 갤러리를 오랜만에 듣는데 전원이 다 되었다. 충전을 완료하지 못하고 나오면 꼭 이쯤에서 전원이 나간다. 열차 안이 적당히 시끄럽다. “출입구의 노란선 밖으로 한 걸음…”이 계속해서 30초에 한 번 간격으로 나온다. 이제는 절규처럼 들린다.
오산역 내리는데 안 내린 누군가가 몸을 반쯤 내밀고 플랫폼을 바라보며 “오산 많이 좋아졌다, 기차도 서고”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는 당신은 어디에 사십니까? 오산에 아무런 정 없지만 순간 좀 발끈했다.
이마트 가는 길 토요일, 어린이들이 한 가득이다. 월드컵 햄버거 꼭 한 번 먹어야 되는데… 조그만 트럭에서 햄버거 구워 파는 사람이 있는데, 귀에는 블루투스 헤드셋을 하나 끼고 엄청 프로페셔녈한 몸놀림으로 계란을 부치고 버거를 굽는다. 수제버거 유행도 한물 가는 것 같지만, 내가 수제버거 가게 차린다면 저 사람을 스카우트하고 싶다. 버거는 비록 한 번도 안 먹어봤지만, 몸이 보여주는 기운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이마트 돼지앞다리 불고기와 호주 쇠고기 치맛살이 세일이길래 좀 샀다. “치맛살은 지방 하나도 없고 부드러워요”라고 판매원이 말한다. 우리는 지방의 존재가 원죄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바구니째 계산대에 올려놓으니 알바생으로 보이는 듯한 계산원이 “물건은 바구니에서 빼서 내려놓으시고, 바구니는 아래로 치워주세요”라고 말한다. 졸지에 예의없는 고객이 된 듯한 느낌.
길 건너 짐이 많아져서 버스를 타고 싶으나 오지 않는다. 그냥 걷는다. 사진의 차는 며칠 전에 찍은 건데, 아직도 저러고 있다. 어쩌다 저기까지 올라갔을까.
집 시간은 거의 아홉시. 너무 배가 고파 냉장고에 남아있던 옥수수 통조림을 몇 숟가락 먹었다. 산 떡들 가운데 하나를 먹은 뒤 신속한 동작으로 밥과 국을 꺼내 각각 전자레인지와 가스불에 데운다. 그동안 샤워를 마친다. 얼마나 지방이 없고 부드러운지 확인하려 치맛살 두 조각을 굽는다. 먹을만 했다.
# by bluexmas | 2010/11/07 01:14 | Life | 트랙백 | 덧글(29)
전 오늘 홍대-대림-신도림-망원-상암-수색-신촌으로 다녔는데 bluexmas 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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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님은 좀 쉬셨어야만 했어요. 쉬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정말…
냉동실에 보관해둔 쥐포나 먹으러 가봅니다…
그러고보니 뒷좌석에서 내릴때 불편하단 생각은 했습니다..
우와.
(쩍벌어진 입이 안다물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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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FM은 다 숙지하고 AM을 해야되는데 요즘은 AM부터 배우려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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