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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 되었다. 시바스 리갈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며칠 전에 올렸던 그 양지훈 셰프 인터뷰를 위한 사진 재촬영에 썼던 소품이다. ‘플람베’를 하자고 다시 컨셉트를 제안하고 준비를 해 갔으나, 정작 불을 피울 연료가 없었다. 식당 건물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일대를 한 바퀴 돌았던 기억이 난다. 사비를 털어 샀으니 남은 건 내가 가져왔다. 시바스 리갈을 마신다고 허세떤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싱글몰트 위스키쯤은 되어야지, 허세를 떨려면.
의도적으로 길게 늘어뜨린 하루였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일어가는 했지만,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시체놀이를 했다. 누워서 이런 저런 요리프로그램을 보다가 졸리면 잤고, 배가 고프면 일어나 어제 만들었던 무엇인가나 냉장고에 남아 있던 찬밥을 주워 먹었다. 오늘까지 해야 될 일이 있었지만, 무시하고 느긋하게 지내는 연습을 했다. 이러한 연습은 장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앞으로 5년 동안 익히지 못하면 나는 50살의 어느 날, 두개골이 뻥!하고 터지며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이다. 남들보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남들만큼은 살며 나의 운명이라는 것에도 평범하게 자식새끼 낳고 사는 일상이라는 것이 몫으로 남겨져 있는지 꼭 보고 싶다. 해가 진 다음에야 비척비척 일어났다.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어져 달리기를 해서 롯데마트에 갔는데 먹을만한 고기가 별로 없어서 이것저것을 들었다놓았다 하다가 포기하고는, 20% 할인하는 파스퇴르 우유 두 병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채식이라도 시도하는 인간처럼 두부와 새송이버섯을 구워서 반찬으로 먹었다. 밥을 안쳐놓고 나갔는데, 내가 한 밥치고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 나는 밥을 그렇게 잘 짓는 편이 아니다. 나는 까칠한 밥을 좋아해서, 다른 사람과 나눠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이 까칠해서 밥도 까칠하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아, 11월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당혹스럽다. 올해를 시작하며 세워놓았던 계획 가운데 하나를 거의 손도 못 댄채 흘려 보내기 때문이다. 그 계획은 도망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도망가고 싶지만, 그만큼 도망가고 싶지 않다. 떠돌때 떠돌더라도 뿌리는 어디엔가 심어놓고 떠돌고 싶다. 지금 떠돌면 뿌리를 삽으로 파서 두 손에 쥔채로 떠도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 모든 자질구레한 욕망들을 만족시키는 삶을 다시 찾고 싶지만, 그건 언제나 그렇듯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게 살아봐야 이제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 이러니 저러니 말을 많이 해도, 결국 삶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나와 나의 온갖 자질구레한, 너무 자질구레해서 누군가에게 드러내놓고 말도 할 수 없는 욕망들 사이에서 벌이는 싸움으로 재편된다. 보다 더 거창한 무엇인가가 인간 존재의 명분으로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 by bluexmas | 2010/11/01 03:08 | Life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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