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아몬디에-에르메님 그림자 즈려 밟고
며칠 전, 지하철에서 노사연이 광고 모델로 나온 결혼정보업체 광고를 보았다. 누구나 알기야 하겠지만, 사실 노사연은 가수다. 아주 먼 옛날, 기타를 처음 학원에서 배울 때 <님 그림자>라는 노래를 배웠던 기억이 난다. ‘저만치 앞서 가는 님 뒤로 /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라는 가사가 인상적인 노래였다.
왜 노사연이며 님그림자를 들먹이냐하면, 안국동에 새로 문을 연 <아’몬’디에(공식 표기가 그렇지만 왠지 아’망’디에-Amandier-가 더 맞는 것 같다. 말의 느낌도 둥글둥글하니 더 좋지 않나? 모르겠다 귀찮다-_-)>에서 에르메님의 그림자를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잘 모르고 그저 피에르 에르메 밑에서 일하던 파티셰가 문을 연 곳이라고 해서 가 본 건데, 알고보니 파티셰는 네덜란드 출신이라고 했다(이런 정보 측면에서는 네이버의 파워블로거님들이 잘 알고 계시는 듯 하니 그쪽을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남들 다 하는 이야기를 굳이 나까지 할 필요는 없다). 작은 케이크집을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엄청나게 큰, 프랜차이즈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다.
정확하게 어떻게 마케팅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원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피에르 에르메와 일했다고 한다면 그 사실 위주로 알려질 것이다. 그래서 혼자서 밀푀유와 이스파한, 그리고 카놀레 하나를 시켰다(앞의 둘은 각 6,500원, 카놀레는 1,800원). 받으면서 어떻게 먹는 게 좋냐고 물어봤더니 이스파한이 많이 달기 때문에 카놀레-밀푀유-이스파한의 순으로 먹는 게 좋다는 대답을 들었다. 내가 산 것들도 그렇고, 나머지도 모두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일단 카놀레의 반을 갈라보았다. 겉은 ‘바삭’보다는 ‘파삭’하다는 형용사가 어울릴 정도의 상태였는데 속은 끈적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찐득거렸다. 이에 달라붙을 것 듯한 풀의 느낌? 그래서 일단 반만 먹었다.
그리고 밀푀유. 잘라볼까 나이프를 댔는데, 잘리지 않고 그대로 눌려 주저 앉는다. 어? 패스트리만 일단 입에 넣어봤는데 조각조각, 켜대로 흩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는 질겼다. 패스트리 크림은 단맛의 균형이 그 정도면 맞았지만, 이렇게 ‘파이핑’을 하지 않고 완전히 한 층을 이루도록 크림을 넣으면 사실 패스트리와 균형이 맞지 않기가 쉽다. 마지막으로 먹었던 페이야드의 밀푀유 또한 그래서 균형이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둘 다 깊은 맛은 없어서 맛의 여운이 금방 스스륵, 하고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스파한. 마카롱의 껍데기가 정확하게 어떤 식감을 가져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기는 있나? 하여간 누군가는 쫀득한 맛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폭신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한다. 결국 식감을 이루는 것이 계란 흰자+공기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 그렇다(기술적인 측면에서 정확히 아시는 분이 있다면 조언 부탁합니다… 저도 좀 더 알아볼 예정). 어쨌든, 설사 쫀득한 것이 더 이상적인 식감이라고 해도 이 마카롱의 껍데기는 위의 패스트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질겼다. 설사 겉은 질기더라도 속은 폭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속까지 질긴 느낌이랄까? 지지난주에 양지훈 셰프의 새 식당에서 먹은 점심 코스의 디저트에도 마카롱 껍데기가 나왔는데, 그게 더 나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산딸기는 거의 대부분 냉동인 분위기던데, 이 산딸기는 해동을 잘 했는지 아니면 생물이었는지 냉동의 느낌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르 푸티 푸의 산딸기 젤라토라든지, 페이야드의 ‘루브르’와 같이 산딸기 퓨레를 쓰는 것들이 다 그렇듯, 그 한계 때문인지 궁극적인 맛은 위에서 언급한 둘과 거의 비슷했다. 마지막에 살짝 풍기는 구연산의 뉘앙스마저도 그러했다. 이스파한이라면 장미향이 풍겨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렇게 많이 달지 않았다.
일단 눈으로 보았을때 아주 장래성이 있어보였던 디저트들은, 먹어보니 그보다는 못한 느낌이었다. 물론 일본에서 에르메님 마카롱을 공수해다가 먹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난 봄 우리나라에 모시고 왔을때 그 특징이 무엇보다 첫맛 다음에 짝을 지어 놓은, 두드러지는 뒷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디저트들에서는 그런 뒷맛이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깊은 맛을 예상했으나, 그 여운이 너무 짧았다. 밀푀유에서 느꼈던 헤이즐넛/아몬드의 뒷맛이라거나, 마카롱 또는 이스파한에서 느꼈던 단맛 뒤에 꼬리처럼 달아놓았던, 그러나 더 여운이 진하고 길었던 뒷맛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이것이 파티셰의 선택인건지, 아니면 그 예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을 배려해준 결과인지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가격까지 생각해보았을때 디저트들은 언급한 노사연의 노래처럼 길게 드리워진 님그림자를 멀리에서 즈려 밟는 듯한 상태였다.
그러나 가격대가 만만치 않으니 에르메님 그림자만 먼발치에서 밟는다고 해서 서러움까지는 느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노동집약도까지 고려한다면 이 가격이라고 해도 만 원에 육박하는 말도 안 되는 샌드위치류나 볶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태운 콩으로 내린 커피나 오천원씩 받고 파는 집보다는 이런 것들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만하면 훌륭한 완성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들어와서 근본도 없으며 또한 연구도 하지 않은 티가 팍팍 나는 양과자류를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파는 가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좀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에르 에르메의 이름과 거기에 맞춘 가격대 때문에 기대를 크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잘못하면 자충수가 될지도 모르겠다.
빵이나 커피도 있었지만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았으며 맛을 알고 나니 나머지는 순수한 칼로리인 것 같아 먹다가 1/3쯤 남겼다. 솔직히 별로 아깝지는 않았다.
아몬디에, 피에르에르메, 디저트, 마카롱, 밀푀유, 이스파한, 카놀레
# by bluexmas | 2010/10/26 16:15 | Taste | 트랙백 | 덧글(10)
이스파한은 어떤 맛인가 좀 궁금해요. ^^
어딜가든 항상 저 묘한 끝맛이 뭣때문인가 싶었는데 ..
마카롱은 묘하게 복불복이던데요.
어제 처음 가서 마카롱 전 종류를 제패해봤는데,
만든 후에 경과 시간에 따라 다른건지 어쩐건지 한두개는 질겼고 대여섯개는 보통에 또 한두개는 정말 딱 좋은 식감이었어요.
다 먹고나서 묘하게 에르메가 생각난다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요 -ㅅ-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