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아홉시 반쯤 비실비실 일어나 점심때까지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스포츠 중계를 보다가 지겨워지면 책장을 정리했다. 날씨가 이래서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대체 빨래를 할 수가 없으니 그 점에 짜증이 났다. 돈을 많이 벌면 건조기를 사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가 그거 말고도 더 필요한데 사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곧 아무런 생각이 없어졌다. 남은 밥 3/4공기에 계란 두 개를 섞어 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계란 냄새가 거슬렸다. 굴소스나 미림 따위를 좀 넣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을 밥을 입에 넣으며 계속했다. 그리고는 해나 반짝 나길래 화장실과 부엌 등에 널려 있는 발깔개를 빨았다. 급한 속옷 빨래는 아침에 싹수가 좀 괜찮을 것 같아 진작 좀 해 둔 상황이었다(입을 속옷이 없어 급하다기 보다, 빨아야 될 옷을 오랫동안 빨지 않으면 마음이 급해져서 급한 빨래다). 그리고는 소파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비가 미친듯이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은 본가에서 먹었다. 요즘은 뭐든지 먹고 싶고, 또 먹고 싶지 않다. 그런 기분으로 저녁을 먹었다. 있으면 또 먹으면 먹지만 없거나 안 먹기를 바라는 마음은 늘 있다. 간소한 식생활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소파에 누워 <황금불고기>를 보고는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김치를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으나 집에는 내가 담근 깍두기까지 세 종류의 김치가 있고, 요즘 나는 김치를 거의 먹을 일이 없다. 입이 헐어 있어 그런 종류의 음식이 더 먹고 싶지 않다. 매운 걸 별로 먹고 싶지 않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집에 잠깐 있었지만 나는 가족이며 명절 같은 것과 너무 궤를 같이 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속으로 넌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거냐,를 되풀이해서 물었다. 알게 뭐냐. 그래도 무단횡단 거의 하지 않고, 담배 꽁초 길에 대강 버리지 않는다(아예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인간성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사람들은 잘 모른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알아도 어쩔 수 없다). 소파에 누워 아메리카스 테스트 키친을 대여섯편 보면서 졸다 깨다를 되풀이했다. 이건 바로 ‘나는 오늘 숙제를 했다’의 삼십대판 일기. 검사할 선생님이 없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마지막으로 일기를 검사한 그 분께서는 교육자라고 하기에 좀 뭐한 분이셨다. 바글바글한 파마머리와 동그란 안경, 뾰족한 입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음식포스팅을 보고 링크를 추가한 사람이 이런 글을 보면 놀라는 것으로 알고 있다.

 by bluexmas | 2010/09/22 00:24 | Life | 트랙백 | 덧글(12)

 Commented by squamata at 2010/09/22 00:47 

마지막 문장에서 한참 웃었네요… 그러다 일기 검사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하고 조금 뜨끔해졌습니다.

역시 선생님 같은 건 꿈도 안 꾸길 잘 했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9/23 00:12

아뇨 뭐 일기를 위한 일기는 아니니까요. 정말 좋은 선생님들도 물론 계시죠.

 Commented at 2010/09/22 01:0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9/23 00:13

네^^ 그러시다니 감사. 그냥 허를 찌르기 위한 한 줄이었다고나 할까요? 명절 노동에서는 해방되셨는지요?

 Commented by Nick at 2010/09/22 01:12 

연애가 필요한 시점같아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9/23 00:13

네?

 Commented at 2010/09/22 16:3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9/23 00:13

친척=악의 무리인 걸까요? 다들 역할극에 너무 충실해서… 결혼하기 전엔 결혼 안하냐고, 하면 애 안 낳느냐고, 애 낳으면 어디 유치원 보내느냐고, 또 유치원 보내면… 정말 싫죠?

 Commented by SF_GIRL at 2010/09/22 21:26 

황금불고기! ‘ㅅ’

얼핏 이야기 구조를 전해듣고 제 취향일 것만 같은데, 언제 주말에 좀 봐봐야겠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9/23 00:14

으음 그런 취향이신지는 몰랐는데, 또 그럴 것 같기도 하네요;;;; 황금 ‘불’고기는 일부러 그렇게 쓴 건데 지적하시다니^^

 Commented by SF_GIRL at 2010/09/23 00:15

아 일부러 쓰신 줄 알았죠. 근데 황금물고기보단 황금불고기가 훨씬더 보고 싶은 느낌 ‘ㅅ’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0/09/23 11:46 

계란 두개로 어찌 볶음밥을 만드셨는지.

저처럼 손 느리고 음식 만들기 두려워 하는 아낙을 위해 레시피 좀 올려주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