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요리 4부작(3)-한식의 미래?
‘초록바구니’라는 이름의 음식점에서 분자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전부터 그 존재를 알고 있던 <분자요리의 첫걸음>이라는 책이 초록바구니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기사를 마무리하기 전에 꼭 가서 먹어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어딘가에서 분자요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는 데에서는 한 번씩 먹어보는 것이 글을 쓰기 위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른 것이 바로 셰프 스페셜(120,000, 부가세 별도-_-). 들르기 전 셰프님과 가졌던 몇 번의 전화통화로, 굳이 거기까지 시킬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다 먹고 나서 셰프님과 또 이야기를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조리를 전공하는 학생들의 경우 외국에 나가지 않고도 분자요리라는 것을 접할 기회를 주기 위해 그런 기술적인 측면 위주로 코스를 짜서 음식을 내지만 나 같은 경우는 먹어본 경험이 있는 것 같아 딱히 그런 음식의 비중을 높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먹었던 코스에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분자요리라고 할만한 것이 적었지만, 어쩌면 그런 건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먹은지가 벌써 몇 달 된 음식이므로, 부분부분 기억이 희미하다. 그런 것들은 억지로 짜내지 않고 그냥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라고 쓰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기억이 안 날 줄은 몰랐다. 사진을 봐서는 깨죽 종류인 것 같다. 죽보다 같이 나온 반찬의 짭짤함이 기억에 남는다.
두 번째 전채. 맨 오른쪽의 것은 ‘공기떡’. 엘본 더 테이블에서 마쉬멜로우라고 했던 것과 거의 같지 않나 싶다. 입에 넣으면 바로 녹아버린다. 가운데 있는 밀전병의 야들야들함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가운데에는 날당근이 들어 있는데, 전병의 식감을 생각한다면 당근을 살짝 익혔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은 연어(?)와 토마토, 뒤는 얇게 저민 사과를 탈수(구워?)시켜서 만든 그릇에 담은 연어알이다. 이쯤 먹었을때, 무엇보다 재료의 신선함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히 토마토의 부드러운 단맛(마트에서 파는 토마토에서 이런 단맛을 기대하기란 굉장히 힘들다…), 연어의 짭짤함의 대조가 두드러졌다. 사과로 만든 그릇 아래에 무엇인가 깔려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새우 세비체. 세비체는 감귤류의 산으로 날생선의 단백질을 익히는 음식이다(불로 익히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겠지만). 알고 있는 세비처럼 새우살을 오랫동안 재워둔 느낌은 아니었고, 살짝 버무린 정도? 오렌지가 가지고 있는 은근한 신맛과 단맛, 새우살의 단맛이 아주 잘 어울렸다. 기억하는 한 전체 코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음식이었다. 물론 새우가 신선하지 않다면 말짱 도루묵이겠지만.
액체질소로 얼린 두부. 가운데 파란 것은 무슨 나물로 만든 페이스트였다. 주방에서 나올때 액체 질소를 뿌려서, 상에 올라오면 두부의 맨 위 가장자리는 얼고, 그 밑은 부드러워 식감의 대조가 분명해지는 음식이었다. 딱 적당한 수준의 액체 질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은 분자요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해파리 냉채. 그러나 굉장히 맛있었다. 무엇보다 ‘해파리=오돌오돌하다’라는 등식을 완전히 박살내 줄 정도로 부드러운 해파리에 충격을 받았다. 이런 해파리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복 새우 조림. 역시 전복과 새우의 신선함이 예외 없었고, 잣의 고소함이 두 재료를 잘 받쳐줬는데 산을 아주 살짝 더했으면 신선함이 더 잘 살아났을지도 모르겠다. 살짝 밋밋한 느낌.
관자와 오이김치. 겉면을 완전히 지졌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안 그래도 별 불만은 없는 관자와 아주 잘 익은 오이김치에서 나오는 산이 굉장히 신선한 조합으로 다가왔다. 김치가 좀 덜 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식사를 마친 뒤 물어보니 요즘은 사람들이 매운 맛을 좋아해서 안 매운 고추가루 찾기가 쉽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젓갈의 존재가 꽤 두드러진다고 느꼈는데, 서울식 김치라 젓갈이 그렇게 많이 안 들어간다고 들었다. 어쨌든 이 조합은 굉장히 인상에 강하게 남았다.
고기 코스의 시작이었던 저온 조리 닭고기. 닭고기 위에 있는 건 죽순인데, 간이 안 된 닭고기와 같이 간을 맞춰 먹으라는 의도로 짠 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음식의 간이 맞는 상태를 100이라고 가정할 때, 어느 한 요소에 100을, 다른 요소에 0을 주는 식의 조합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의 간이라는 것이 소금을 넣고 열을 가한 다음의 상태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적으로는 50:50이 되어야 하겠지만, 70:30 정도까지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음식을 이루는 요소가 많다면 간이 골고루 분배되어야 한다. 탕수육을 예로 들자면, 소스에 간을 100으로 몰아넣고 튀김 재료나 옷에 아예 간을 안 하는 경우가 거의 100%인데, 같은 양의 소금을 넣는다고 해도 소스와 튀김옷, 튀김재료에 골고루 간을 하는 것과는 그 맛이 다르다.
여기서부터 나오는 고기들은 ‘수비드’로 저온조리 한 것인데, 이 닭고기와 계란의 조합은 취향에 맞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서 흐물거린다고 생각하게 될 식감도 그렇지만, 그 식감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온도가 문제였다. 초고추장과 계란의 조합은 괜찮은데, 닭과의 조합은 별로였다. 닭고기와 계란을 함께 내는 ‘오야꼬동’ 같은 음식처럼 이 요리도 닭고기와 계란을 함께 내는, 콘셉트가 두드러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입가심을 위한 두부와 토마토 아이스크림. 두부의 느낌은 아주 많이 나지 않았고, 토마토의 은은한 단맛과 부드러운 식감이 기억에 남는다. 훌륭했다.
다음 역시 저온조리한 뒤 겉면을 지진 갈빗살(?). 입에 넣으면 녹는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 듯. 그러나 씹히는 걸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이런 고기가 어떻게 다가올까 굉장히 궁금했다. 저온조리한 단백질을 서너종류 연속으로 먹고 나니, 거의 천편일률적인 식감이 언제나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농어(?). 역시 저온조리. 간이 좀 부족했던 기억이… 음식을 내는 순서로 보았을 때 이쯤에서 생선이 나오면 맞는 것일까?
갈비찜(?)… 의외로 간이 좀 셌었다. 고기도 고기였지만, 사진에서 보이는 목이버섯이 야들야들하니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상 떡 벌어지게 내온 밥. 솔직히 이렇게 먹고 밥까지 먹을 필요는 없는데, 사람들은 꼭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낸다고, 나중에 들었다. 밥은 아주 약간 마른 느낌, 그러나 전체적으로 나무랄데 하나 없는 밥이며, 국, 그리고 반찬이었다.
수정과. 자잘한 거품이 꼭 에스프레소 바리에이션 드링크를 만들때 쓰는, 올린 우유 같은 느낌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올렸는지 따뜻했고, 단맛보다 한약재의 향이 더 두드러졌다. 레시틴 같은 걸 더했나 생각했는데, 첨가제가 안 들어간 것이라고 들었다.
이걸로 끝난 줄 알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기다리고 있던 디저트. 오른쪽은 기주떡과 막걸리 셔벳. 둘 다 은은한 단맛과 술향이 좋았고, 왼쪽은 삶은 수박 위에 설탕 옷. 그 앞에 있는 크림은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수박과 바삭거리는 설탕옷의 대조가 좋았고, 별로 달지는 않고 특유의 풋내, 또는 향만 있는 수박을 설탕의 단맛이 잘 보충해주었다.
여기까지 먹는데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뒤로 두 시간은 충분히 넘는 시간 동안 셰프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는 분자요리부터 한식의 세계화까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차피 너무 많이 늘어 놓아봐야 지루할 것 같으니 그건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생각했던 것보다 ‘분자요리’ 그 자체을 많이 먹게 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 한끼의 식사로 분자요리라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 고급 한식의 현주소나 한식, 또는 한식의 세계화에 대한 미래와 같이 굵직굵직한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식당이 분자요리를 한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재료는 물론, 조리를 포함한 맛이며 음식 그 자체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정식당은 초록바구니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종류의 음식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한식에서도, 또한 양식에서도 주류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런 음식이야말로 한식의 미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이해와 연구, 그것이 바로 이런 음식을 만드는 바탕이다. 그런 바탕에다가 좋은 재료와 성의만 있으면 좋은 음식 만들기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접근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정도의 이해와 연구 흔적을 보여주는 음식점들이 그렇게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바게트에 청양고추 넣었다고 호들갑 떨어주는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다음에 치아바타에 오이고추를 넣을 생각이다.
# by bluexmas | 2010/09/20 10:00 | Taste | 트랙백 | 덧글(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