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와 밀가루의 하루
예상대로 상쾌한 아침이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무려 아침 운동까지 하고 치과로 향했다. 딴 생각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20분 늦지만 않았어도 실로 회사를 그만 둔 후 처음으로 가져보는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 될 뻔했다.
그렇게 상쾌하게 시작한 아침은 잇몸을 무차별적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마취주사에 의해 한결 더 상쾌해졌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렇게 아침 이른 시간에 치과치료를 받았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잇몸에 마취주사까지 맞아가면서 치과치료를 하고 싶겠나? 그 뒤로는 눈 가리는 것 빼놓고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뭐 소음도 만만치 않기는 했지만. 그거랑 일곱 시에 체육관에 울려퍼지는 서@영의 노래랑 뭐 다를 거 있나?
거하게 장-태풍 때문에 거시기해서 우유 수급이 좋지 않단다. 그래서 우유도 제대로 없고 크림은 물론 버터도 없었다-을 보고 돌아와 점심을 먹고는 오후 내내 밀가루를 만졌다. 아메리카스 테스트 키친에서 보고 꼭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곡물식빵(끓는 물을 부으면 개밥처럼 되는 시리얼을 기본 재료로 써서 만든다. 그것마저 없어서 요즘 열심히 먹는 영국산 시리얼을 갈아서 물을 부어 그 개밥을 재현했다)부터 시작해서 머핀, 포카치아, 심지어는 토티야와 생파스타까지 밀가루로 만들 수 있는 걸 거의 총망라해서 오후 내내 만들었다. 그러나 모두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물론 재료가 뻔하니 먹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건 없었지만, 집 밖으로 내보낼 만큼의 보기가 좋은 것도 하나 없었다. 식빵은 정말 맛이 괜찮았지만(내가 만들고 내가 맛있다는 이야기는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그것보다 추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쉐프 같은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언제나 예측 가능한 맛으로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나는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다고 느낄 확률이 굉장히 적거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건 내가 잘 만들어서가 아니고, 재료의 조합이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하는 만큼 부풀지도 않았고 또한 겉도 굉장히 딱딱했다. 따라서 이건 ‘나의 반죽 능력 부족+발효 부족+오븐 온도 이상’의 실패요인 삼위일체가 골고루 역량을 발휘한 총체적인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그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되나 생각이 들 정도로 요즘은 음식을 잘 못 만든다. 원래 잘 만드는 것도 아닌데 이건 좀…
한편 생각해보면, 요즘은 그래도 좀 쉬는 기간이라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는데 계속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자꾸 쫓기는 기분이 들어서 뭐든 제대로 못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결국 이게 어떤 분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불안한 것이겠지). 물론 음식 만들기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야 서둘러야만 하는 환경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여도 실패하지 않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하겠지만, 나는 그냥 즐기기 위해서 하는 건데…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돌아온 뒤로는 장보기를 별로 즐기지 않게 된 것 같다. 음식 만드는 것 자체가 싫어진 걸까?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니까, 결국 그냥 사는데 팍팍해서 재미를 덜/못 느끼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 결국 문제는 그거다. 그냥 사는게 팍팍한거다, 사는게… 그것 때문에 온갖 다른 문제들이 생기고, 또 그게 다시 삶을 팍팍하게 만든다. 결국 악순환인거지? 아 모르겠다… 어쨌든, 뭔가 몰두할만한 일을 찾아서 해도,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러다가 가끔 큰 일 난 적이 있어서.
# by bluexmas | 2010/09/15 00:28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