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2일차

모텔방은 감방같다. 물론 조건이 아주 좋은 감방이기는 하다. 에어컨도 있고, 화장실은 물론 인터넷도 있다. 어제 저녁, 오늘 점심으로 먹은 밥들이 무슨 구내식당이나 군대 짬밥 같다 보니 그런 격리의 느낌이 한결 더 강하다. 물론 나는, 이 곳에 스스로를 격리시키기 위해 왔지만 조미료를 인심 후하게 친 느낌의 황태국을 점심으로 모시고 나니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서 강릉으로 나가 저녁을 먹고, 멀리 보이는 이마트 간판을 따라가 사과와 천도복숭아, 바나나를 사왔다. 두부마을인지 뭔지에서 나처럼 혼자 오는 사람을 위해 딱 하나 갖추고 있는 메뉴라는 무슨 두부 백반을 먹었는데, 맛보라고 내준 비지에서 조미료맛이 좀 났지만 두부도 맛있었고 나머지 반찬들도 딱히 나무랄데 없었다. 여기도 그렇고, 심지어 구내식당 분위기의 밥을 내놓은 정동진의 다른 식당들에서도 밥 자체는 굉장히 맛있었다. 오히려 곡창지대라는 전라도의 식당들에서 먹는 밥이 훨씬 더 맛이 없었다.

입식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좌식생활이 솔직히 버겁다. 다른 것보다 바닥에 눌리는 양쪽 복숭아 뼈가 너무 아프다. 배부른 투정인가… 나말고는 손님이 거의 없는 모텔의 주인 아주머니는 다섯 시쯤 잠들어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인 열 두 시쯤인가에 방을 비울거냐고 물었고(뭐 이해는 한다), 두 시쯤 밥을 먹으러 가는 나를 붙들고 숙박비를 달라고 했다. 이해는 하지만 귀찮은 게 싫어서 한 마디 했더니 자기도 서른 살 먹은 아들이 있어서 나한테 잘 해주고 싶은데 말을 너무 함부로 한다고 바로 들이댔다. 아줌마 아들은 서른일지 몰라도 나는 마흔이 낼 모레다. 아들처럼 잘 해 줄 필요도 물론 없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숙박비는 다 이만큼 받는 걸 다 알고 있다. 아마 내가 진짜 제대로 진상 떠는 60대 노인네였다면 아줌마는 끽소리도 못했을거다. 내일은 속초로 가려고 한다. 금요일까지만 집에 들어가면 될 것 같아서 조금 더 있어보려 한다. 물론 내가 이 여정을 즐기고 있느냐면 그건 절대 아니다. 이건 그냥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니까, 휴가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휴가 보내고 싶은 생각도 절대 없고, 밖에 나와 있는 동안 일이 막 쏟아지고 있으며 마감도 촉박하다. 물론 일이 많은 건 즐겁다.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은 거잖아, 그런 거지? 내일, 아니 조금 있다 아침으로 먹을 구운 계란을 사다 놓았더니 행복하다. 강원도 여행에는 구운 계란이 최고라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지만 뭐, 다 그런 거지.

 by bluexmas | 2010/08/25 04:28 | Life | 트랙백 | 덧글(12)

 Commented by 파고듦 at 2010/08/25 07:17 

아 먹고 싶네요 구운계란.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8/27 17:04

오븐 돌릴 일이 있다면 집에서 구워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 바늘로 구멍을 뚫어야 터지지 않겠죠?

 Commented by devi at 2010/08/25 08:00 

강릉은 저도 종종 가는 곳이에요.

혼자 가서 밤바다 보고 두부먹고 호수 한바퀴 돌고.. 오면 기분이 좀 나아지곤 했죠.

전라도 밥이 맛이 없었다니 의외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8/27 17:05

기차 타고 가기에 좀 멀지요-_- 차로는 금방 가는데. 그러게 전라도 밥이 맛이 없어서 저도 얼마나 놀랐는데요… 곡창지대 아닌가요-_- 지은지도 좀 되었고 풀기도 없는 그런 밥이었어요.

 Commented by 당고 at 2010/08/25 11:31 

강원도에도 비 내려요?

서울은 다음 주 초까지 계속 우산 표시예요;

입식생활에 익숙하니 좌식이 정말 불편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8/27 17:05

내내 비 왔어요. 마지막 날에는 탁자가 있는 방에서 입식생활을 만끽했습니다^^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0/08/25 11:34 

즐거운 휴가를 보내셔야 합니다요.

인습이나 관습은 신경쓰지 마세요.

정말 신경써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ㅋ

—청*회 방송보다 욕나와서 이너넷 하는 국민.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8/27 17:05

아, 이건 정말 휴가가 아니었어요… 밤새 일하고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고 뭐 그랬지요;;;

 Commented at 2010/08/25 14:3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8/27 17:06

으아 그거 정말ㅠㅠㅠ 저는 회사 다닐때 정말 월급이 너무 안 올라서 별별 일이 다 있었다니까요… 차마 여기에 말도 할 수 없어요ㅠㅠㅠ

 Commented by 꿀우유 at 2010/08/25 20:09 

구운 계란 ㅎㅎㅎㅎㅎ

조미료맛은 좀 났어도 맛있는 식사도 하셨다니 잘됐네요! 저도 회사다닐 때 종종 가던 곳인데(거기도 체인점이었을까요?) 한식 그리고 두부를 워낙 좋아해서 늘 맛있게 먹었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8/27 17:06

회사를 강릉에서 다니셨어요? 저도 두부 워낙 좋아해요. 바로 만든 두부 정말 맛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