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삽질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왜 일기까지 검사를 맡아야만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저학년 때에는 별 자각이 없었지만 6학년이 되니 일기를 검사맡아야 된다는 사실에 정말 불편했다. 물론 그건 그때의 여 담임 선생을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분께서는 일기의 양에 참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셔서, 짧게 일기를 써 가지고 가면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래서 온갖 쓸데없는 말로 한 장을 꽉꽉 채워야만 했다. 때로는 ‘이렇게 길게 일기를 쓰기 싫다’라는 문장을 마지막에 슬쩍 집어넣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양만 보는 그분께서는 정작 대놓고 보내는 불만의 메시지는 접수하지 못하셨다.

어쨌든,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짧은 일기로 투쟁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나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특히 저학년의 그림 일기 시절, 졸라맨 수준의 간단한 그림에 ‘나는 오늘 숙제를 했다’ 단 한 줄로 마무리하는 일기가 주는 반항심 또는 투쟁심은 비굴한 내가 평생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대담함의 산물이어서 언제나 부러워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오늘 숙제를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와 같은 느낌. 그나마 숙제라도 했다는 게 어딜까. 같은 한 줄이라도 ‘나는 오늘 숙제를 안 했다’ 보다는 훨씬 긍정적이지 않나. 그렇게 긍정적인 간결함을 가진 아이들을 왜 선생님들께서는 그렇게 심하게 체벌하셨을까나. 물론 나는 그 깊은 속을 여태껏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오늘 숙제를 했다>풍으로 쓰는 오늘의 일기<나는 오늘 삽질을 했다>

무제한 낮술 약속이 있어 나가야 했던 오늘, 나가는 순간까지 차를 가지고 가야 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했다. 아무래도 무제한 낮술의 기회니만큼 운전을 안하는 것이 사회의 안녕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지막 순간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하고 집을 나섰다. 열한시 삼십 분 차를 타야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으므로 20분쯤 전에 집을 나섰으나 곧 핸드폰을 안 가지고 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집에 들어가야만 했다. 때는 이미 열한 시 십오 분, 버스도 올 조짐이 보이지 않았고 택시도 보이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택시를 잡아타고 터미널을 외쳤으나 어째 여유가 없어 보여, 서울 가는 버스들이 대부분 정차하는 터미널 다음의 정거장인 시청 앞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곧 남부터미널행 버스가 오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더니 동서울로 가는 버스는 터미널에서 바로 고속도로를 탄다는 것이었다. 버스 시간까지 6분쯤 남아 나는 다시 터미널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택시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 터미널 바로 다음 버스 정류장쯤 다다랐을때 동서울 터미널행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고, 어차피 더 뛰어갈 수도 없는 나는 버스가 혹시 설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손을 흔들었으나 기사는 고개를 저으며 나를 지나쳐갔다. 그리고 바로 앞 네거리에서 버스가 신호에 걸렸길래 나는 다시 뛰어가 문화시민의 자긍심을 버리고 기사에게 애걸했으나 그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나를 그 자리에 놓고 사라졌다. 버스는 30분에 한 대씩 오고 동서울까지 한 시간, 거기에서 또 약속장소까지 대중교통 없이 20분은 걸리기 때문에 한 시까지 버스를 기다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가 차를 몰고 다시 집을 나섰다. 나는 평소에도 이렇게 병신같이 삽질을 하고 산다. 쓰다 보니 또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by bluexmas | 2010/07/26 02:43 | Life | 트랙백 | 덧글(29)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0/07/26 03:13 

어익후.어쩌다 제가 1등이네요.

열심히 썼던 글이 다 날아갔어요.

근데 아직 저는 일기검사를 하는데…어떡해요.흑흑

그리고 안써오는 넘들이 있으면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단 몇줄이라도 쓰게 한답니다.

그 아이들의 일과를 본다는 생각 보다는,그냥 문장이라도 쓰는 연습을 하는 유일한 통로라서.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6 03:17

아이고-_-;;;저도 선생님들의 그러한 취지는 이해합니다. 다만 상황이 거기까지 갔다면 아이들도 너무노력을 안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_-;;;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0/07/26 03:21 

이런….!@!제가 잠시 밖에 나갔다 오는 사이에 글이 무척 길어졌네요.별다섯개짜리 도장을 받을만한 일기와 같이.이런 일기를 왜 어릴때는 안쓰셨어요.ㅋ

내 배 아파 아이 낳기 전에는 우리반 애들이 모조리 다 잘해야 된다고 매를 들면서까지 독려(?)했는데 막상 아이를 낳고 나니까 뭐랄까,그렇게 마음을 쓴다고 알아줄 아이도 없을 뿐더러

매일의 일과가 티비보기-학원가기-게임하기-군것질하기-외식하거나 먹기의 순환일텐데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을 매일 다르게 써야 하는 고충도 참 크겠드만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6 03:25

아이고-_-;;; 글은 원래 있었습니다. 저러고 나니 삽질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고 나니 <나는 오늘 숙제를 했다> 생각이 나서 두 개를 써서 엮은 거구요. 물론 저는 일기를 그럭저럭 썼는데 6학년 때는 반항심에 잘 안 쓰려고 했던 것이죠. 여러가지로 학생들을 잘 못 다루는 교사로 기억합니다. 그것에관한 이야기가 아마 블로그 어딘가에 글로 남아있을 거에요.

문제는 사실 쓸 거리가 없는 것보다는 의욕 및 상상력 부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반어적으로 쓴 것이고 <나는 오늘 숙제를 했다>는 좀 안타깝죠. 안 했다고 쓰는 것보다는 물론 낫습니다^^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0/07/26 03:28

<나는 오늘 숙제를 했다>는 엄청 착한 멘트에요.

독서록 검사를 해보면 제목은 “신데렐라”인데

나는 오늘 신데렐라라는 책을 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독후감상문이 다수지요.

그러면 저는 소리를 버럭,또는 꽥 지르며 지우고 다시 쓰라고 합니다.

여러번 말해도 제 말 자체를 이해못하는 애들을 보면

애들은 그냥 애들이라서 그럴까요.

아니면 제가 너무 심한 사투리로 말해서 그럴까요.흐흐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6 03:29

아… 그 독후감에 대해서 또 할 말이 많아요. 초등학교 방학 때 <독서교실>에서 목도한 상황인데요, 따로 글을 한 번 써봐야 되겠는데요. 원래 독후감에 감상만 쓰거나, 줄거리와 감상을 번갈아 쓰거나, 줄거리만 쓰는 경우가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엄격하게 따지자면 세 번째 경우는 독후감도 아니겠죠?

 Commented by 풍금소리 at 2010/07/26 03:33

그럼요 블루마스 선생님.

줄거리-감상을 써야 정석화된 독후감상문인데

감상을 써봤자 딸랑 한줄.

아니면 줄거리만 달달 베끼거나—요약하는 훈련이 안되었습니다.지나치게 짧거나 길지요.

이러한 독후감상문이 많지요.

뭘 하나 하려면 열이 넘게 가르쳐야 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훌쩍 뛰어넘어 창의성 교육을 하라는 건지 알수가 없네요.

이제는 매도 들면 안되니까 상냥하게 (웃으며) 말로만…

 Commented by Nick at 2010/07/26 03:47 

이전에도 버스 때문에 웃지 못할 상황을 겪게 되신 포스팅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놈의 버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7 01:45

아 뭐 지방도시에서 일요일에는 버스가 자주 오지 않으니까요. 핸드폰 두고 나온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냥…

 Commented by 스토리작가tory at 2010/07/26 07:39 

독후감이나 일기쓰기, 시 외우기 이런걸 어릴때 억지로 (싫어도) 시켜서 질려서 커서 안하는 거 같아요. 어릴때 기억들이 무의식에 트라우마로 남는 경우가 많다고 하죠. 거기까진 안가더라도 반감이 내재 되는 거 같아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7 01:55

그렇죠. 왜 시키면 좋은 것도 싫어지잖아요. 뭐 그런 격이라고나 할까요….

 Commented by Cheese_fry at 2010/07/26 09:00 

독후감에도 정답이 정해져 있는 줄은 몰랐네요. 흐음..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7 01:56

정답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닌데 독후감이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책을 그대로 옮겨적는 것에 불과한 건 뭐 아니함만 못하지 않겠냐…하는 생각이겠죠 뭐.

 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10/07/26 10:08 

마지막 문단의 상황은 저도 가끔 겪는 일이라 많이 공감합니다. 삼가 애도의 뜻을 함께… -.-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7 01:57

네-_- 눈물 대신 땀을 좀 흘렸습니다. 꽤 덥더라구요ㅠㅠㅠ

 Commented by 당고 at 2010/07/26 10:55 

저는 중학교 3학년 때도 일기 검사를 받았더랬죠. 담임이 참 사이코스러워서;

뭐, 저야 인생일 삽질이라…..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7 01:57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여학생의 일기 검사는 좀 심하네요 ㅠㅠㅠ 저도 인생 삽질 징하게 합니다ㅠㅠㅠ

 Commented by 닥슈나이더 at 2010/07/26 11:11 

ㅠㅠ;;

전 인생이 씨트콤이라고… 씨트콤 인생을 산다는 아가씨를 소개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7 01:58

으음 그래서 두 분이 공동 주연으로 시트콤 한 편 찍으셨나요ㅠㅠㅠ

 Commented by 아스나기 at 2010/07/26 11:33 

원래 좋지 않은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법이지요. 마음이 급하면 더 그런거 같기도 하고…

욕보셨습니다 .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7 01:58

뭐 멍청한 인간의 자충수라고 생각합니다-_-;;; 저의 불찰이지요…

 Commented by 마리 at 2010/07/26 12:34 

저는 여의도에서 분당갈일이 있던날..

1시간에 몇대 안오는 버스를 바로 놓치고

1시간을 기다려서 1시간 걸려 분당도착한 후

30분 동안 화를 못 삭힌 경험이 있답니다.

스스로를 쥐어 패고 싶죠..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7 01:58

그냥 벽에 돌진하는 겁니다!!! 그럼 안되겠죠-_-;;;;

 Commented by 루에토 at 2010/07/26 14:10 

꼭 그런 날엔 폭풍처럼 쉬지도 않고 이어지는 삽질 퍼레이드… 마치 한달치 삽질 미리하는 그런 기분이 들곤 합니다. 희안합니다.

저도 아이들의 일기를 검사합니다. 대신 저도 일기 씁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검사를 받지요. 애들은 말로 듣는 것이 아닌 눈으로 보는 것을 따라한다고 믿는지라. 근데-_-.. 전 일기장에 거짓말 좀 많이 써요. ……술먹었다, 울었다, 지름신강림…. 이런 말은 못 써서- 어쨌든

힘내세요. 그 날 술이 달았을 것 같아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7 02:00

아 전 삽질에는 아주 도가 텄어요. 술은 원래 좀 단 종류여서 무제한 마시고 널부러져 있었답니다-_-;;; 앗 루에토님도 선생님이셨군요. 학생들에게 일기를 검사 맡으신다니… 훌륭하십니다.

 Commented by 홈요리튜나 at 2010/07/26 16:44 

아이들을 때림으로써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생각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7 02:00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데 그랬을 수도 있겠죠…

 Commented by Raye at 2010/07/26 20:57 

빨리 그쪽 동네에 경전철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27 02:00

그래도 한 5년은 걸리겠죠-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