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취업의 이유(3)-Flashback 1998
“소등하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내무반이 어둠에 휩싸였다. 모두에게 힘든 하루였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장마에 대부분의 중대 병력이 배수로 작업에 동원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생에서 삽질 기간이라고 많은 장정들에게 일컬어지는 군대에서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일이 삽질이라는 건 정말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그러나 다들 삽질하느라 힘에 겨워 그게 무엇인지 생각해볼 여유는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10년 쯤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고 하는 걸 간간이 주워들을 뿐이었다.
“박성진.”
“……”
어둠 속에서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박,”
“이병,”
그제서야 누군가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야, 저리 가.”
정대리, 아니 말년 병장 정병장은 그의 옆에 누워 있던 상병을 발로 툭 찼다. 상병은 정병장 반대 쪽으로 돌아 누울 뿐,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 새끼가. 정병장은 말년 병장의 힘을 있는 힘껏 모아 상병의 옆구리를 가격했고, 그제서야 상병은 꾸물꾸물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씨발, 말년 주제에 왜 지랄이야. 삐대다 곱게 나갈 것이지.
무려 두 번의 발길질로 옆자리를 비웠음에도 박이병은 자기 자리에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정병장은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까딱, 했다. 그제서야 박이병이 쭈볏쭈볏, 다가오자 정병장은 오른손으로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왜, 내가 잡아먹을까봐?”
“아닙니다.”
“그럼?”
“……”
정병장은 박이병을 먼저 눕히고는 그 옆에 모로 눕고는 계속해서 그의 귓볼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힘들었냐?”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냐. 안 힘들면 짱을 박지 왜.”
“……”
오른손으로 귓불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정병장은 왼팔을 뻗어 박이병의 목 밑에 둘렀다.
“어느 학교 건축과라고 했지?”
“……”
“응?”
“…XX대입니다.”
“그거 서울에 있는 학교지? 나는 OO대 건축과 다니다 왔는데. 어디에 있는 줄 아나?”
“……”
“응?”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박이병의 대답에 정병장은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손에 힘을 주었다.
“93학번이라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난 94학번인데. 나한테 반말 들어서 기분 나쁘겠네?”
“…….”
“응?”
“아닙니다. 여기는 군대입니다.”
그제서야 정병장은 아까처럼 손에서 힘을 뺐다.
“이 새끼.”
“……”
그 자세 그대로, 정병장은 박이병의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얹고는 눈을 감았다. 뻗은 왼팔을 틀어 손으로 박이병의 뒷통수를 잠이 들 때까지 쓰다듬었다.
꿈이었나. 잠에서 깨어보니 그는 박이병과의 바로 그 자세로 아내의 뒷통수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나저러나 상관없이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보자 잠이 확 달아나, 그는 팔을 빼고 아내를 침대 반대편으로 밀친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이, 짜증나. 식탁에 놓여 있던 담배갑에서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문 채로 베란다로 나가서는, 문을 열고 불을 붙였다. 첫 모금을 아주 깊이 빨아 마셨다. 박이병 이 새끼… 왜 죽고 지랄이야, 남의 인생까지 꼬이게. 창 밖으로 비가, 바로 그 날처럼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 by bluexmas | 2010/07/03 02:36 | —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