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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나는 어떤 감정을 가져야 될지 몰라 속으로 계속해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나는 내 감정의 극장 무대에 서 있었다. 빨간 공단 보가 깔린 탁자-토끼가 나오는 마법사의 모자를 올려놓는-에 속이 훤하게 비치는 유리단지가 올라 있었고, 그 안에는 복권 당첨을 위해 쓰는 것만한 공이 두 개 들어있었다. 하나에는 까만 바탕에 흰 글씨로 ‘아쉬움’ 이었고, 다른 하나에는 흰 바탕에 까만 글씨로 ‘반가움’이라고 써 있었다. 단지에 손을 넣었다. 불이 꺼지고, 스포트라이트가 단지를 밝혔다. 그렇게 아무도 부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극장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마른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꿀꺽. 이 오지랖 넓은 사람들, 손에 손을 잡고 한데 다 모였네 내가 어떤 감정을 고르나 보려고. 그 동안 여기가 좋은지, 아니면 거기가 좋은지 둘 가운데 하나를 놓고 사람들이 물어왔던 것처럼, 나는 어느 순간 아쉬움과 반가움, 그 두 감정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공을 손에 쥐어보았다. 묵직한 게, 납으로 만든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두 공을 번갈아 쥐어보았다. 냉기가 손끝을 타고 온 몸으로 퍼졌다. 몸이 움츠러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나는 단지를 두 손으로 높이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언제나 좋기만 한 것, 싫기만 한 것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갈라 전자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후자에게는 차가운 증오를 보내면서 살아왔지만 이번만큼은 감정의 흑백론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자질구레한 것들이 그 까맣고 하얀 것 사이에 색색깔로 오글오글 모여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겪었던 그 모든 일들과 거기에 딸린 감정들을 이런 순간이라고 쓸데없이 뭉뚱그려 마치 원래부터 그랬었던 것처럼 생각하며 품은 채로 살고 싶지 않았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날렸지만 어둠 속의 관중들은 쥐죽은 듯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유리 조각을 헤치고 두 납 공도 집어 들어 객석으로 던져버렸다. 어깨가 빠질 듯 아팠다.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사방이 어둠에 휩싸였다.”
# by bluexmas | 2010/05/26 03:24 | — | 트랙백 | 덧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