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하지 못하니까 독한 거라도
지금 당장 누우면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왠지 자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또 못잔다. 그제도 그랬고 또 어제도 그랬다. 요즘은 철저하게 금주하고 있지만(옷장속의 포도주가 영 줄지 않고 있다. 이럴 때 좀 사서 쟁여놔야 되는데 그것도 안 하고 있네?), 독한 놈으로 한 모금만 마시고 가서 눕기로 했다. 아, 이걸 마시고 독한 인간이 되는 거야. 이건 술이 아니고 독해지는 약이라니까, 독해지는 약… 와, 역시 약이라 그런지 참 쓰네요. 그건 또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병신아.
독해지는, 이라는 말을 꺼내니까 생각이 났는데 초등학교때 친하게 지낸 친구가 중학교에 갔는데 담임이라는 여선생이 그렇게 때린다고 했다. 왜? 라고 물었더니 독해지라고 때린대 라고 대답했다. 맞으면 독해지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모두 독한 인간이 되라고 독려하기 위해서 서로 때리고 또 맞는구나. 좋지, 좋구 말구… 그 독해지지 못해 맞았던 친구는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가 돌아와서는 고등학교때 다시 미국에 가서 몇 년을 보내고 정원외로 대학에 들어갔다고 연락을 해 왔는데, 94년에 한 번 만나고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랄까, 삶이 달라졌는데 그 당시에는 그게 뭔지도 몰랐던 거지. 삶이 달라지는 데에는 누구의 잘못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삶이 달라진 거니까.
싫은 사람을 모두 소환해서 앞에 죽 세워놓고, ‘그래도 나는 당신이 싫어’ 라는 말을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싫어’가 나을까, 아니면 ‘나는 그래도 당신이 싫어’가 나을까 한참을 망설인다. ‘나는 당신이 싫어, 그래도’는 어째 너무 문어투인 것 같아서 일단 제외한다. 그러나 어째 시적일 것 같다는 생각은 좀 든다. 그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보다 싫은 사람을 등 뒤에 두고 말할 때 써야 될 것 같다. 나는 당신이 싫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침묵, 그리고 살짝 깊은 한숨) 그래도(아아 이럴 때 여운은 길어야 돼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 해도)… 어쨌든 고민 끝에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면서 ‘나는 그래도 당신이 싫어’와 ‘그래도 나는 당신이 싫어’를 말하기로 한다. 나는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면 헛갈려서 순서를 틀릴 수도 있으니 조수를 써야 될 것 같다. 옆에 가만히 서 있다가 차례에 맞춰 ‘나는 그래도’인지 ‘그래도 나는’인지 귀띔을 해 주는 거다. 좀 오래 걸릴 것 같지만 그게 끝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그 조수에게 순서에 맞춰 ‘나는 그래도’나’그래도 나는’ 가운데 하나를 말해준다. 아 그러면 차라리 줄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조수로 뽑으면 되겠구나. 나는 독하지 못해서 그런 생각도 잘 해내지 못한다. 그러니까 지금 약을 먹고 있는거지, 독해지는 약이라고. 그런데 그냥 싫으면 싫은거지, ‘그래도’가 들어가야 되는 이유는 뭐였더라?
# by bluexmas | 2010/04/26 03:12 | — | 트랙백 | 덧글(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