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냄새
방광 덕분이었다,
그렇게 오감이 마비된 것은… 열한 시 다 되어서 천안행 마지막 전철을 타는 그 순간, 그의 오감은 이미 마비되어 있었다. 물론 방광 덕분이었다. 막차가 플랫폼에 다가오기 십 분 전에 화장실에 다녀왔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작은 방광은 유전이었다. 세마역에서, 그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열차 안을 종종걸음으로 왔다갔다거렸다. 그러나 사실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가 작은 방광으로 목적지에 채 이르기도 전에 고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열차가 드디어 오산역에 다다르고, 그는 문을 양 어깨로 밀어 열다시피 열차를 빠져나와 열차 안에서 선보였던 그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겅중겅중 올랐다. 누구보다 더 빨리 개찰구를 빠져나가, 화장실로 직행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각자의 왼팔과 오른팔을 활짝 편 채로 손을 잡고 걷는 어린 남녀가 있었다. 아아, 정말 똑바로 계단을 오르기도 힘들 정도였다. 참을만큼 참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유전적으로 작은 방광덕에 마비된 오감을 파고, 그의 코로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그는 마비된 오감을 뚫고 고개를 들어 바로 앞에서 계단을 오르고 있는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손을 열심히 잡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많은 남녀가 오산이 아니라 어디라도 그의 앞에서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그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전철역 계단을 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남녀는 끊임없이 재잘댔고, 또 누군가는 바로 저 둘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도 언젠가는 재잘거렸고, 또 언젠가는 침묵을 지킨 채 그냥 손만 잡고 계단을 오르기도 했다. 그는 그제서야 그의 마비된 오감 사이로 파고 들어오는 냄새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신도림역에서부터 주고 있었던 다리의 힘이 스르륵 풀렸다. 어떤 비밀은 모두가 겪는 것이면서도 그저 비밀로 남았다. 누구나 스스로를 거의 모두가 거쳐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공공연히 입에 담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어떤 비밀은, 모두가 겪는 것이면서도 그저 비밀로 남았다. 비밀의 냄새가 아니었다면 유전적으로 작은 방광 때문에 마비된 오감을 파고 흘러 들어올 수도 없었다.
# by bluexmas | 2010/03/25 01:13 | — | 트랙백 | 덧글(18)
역설적으로 들리는 노래-
복국이라니, 부럽습니다….
bluexmas님의 비밀을 하나씩 알아가는 듯 해서 왠지 ‘친밀감’이 느껴져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