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그란 구스토-너무나도 충실한 기본기
음식을 먹는데 쓴 시간보다 더 오래 들여 글을 쓰는 건 가끔 고통스럽다. 특히나 불만족을 토로하기 위한 경우라면 더 그렇다. 그렇게 생각해보았을 때 그란 구스토에서의 점심은 두 배로 만족스러웠다. 음식 자체도 만족스러웠고, 별로 할 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란 구스토에 가보고 싶어진 건 이글루스 울타리 안에서 가장 독보적인 (여자)블로거라고 할 수 있는 아무개님의 블로그에서 우연히 글을 보고 난 다음이었다. 나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고등어 파스타를 먹어보고 싶었다. 사진을 보면 대강 감이 오는 경우도 있는데 화려하지는 않아도 잘 만든 음식일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처럼, 코스면서도 비교적 여러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이유는 조리법이 번거롭지 않은 음식들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추천딱지마저 달고 있는 굴과 감자수프, 꿩 대신 닭이니까 고등어 대신 삼치 파스타, 파나 코타를 주문했다.
빵은 딱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껍질이 조금 더 바삭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내 취향이고, 아마 굉장히 소수일 듯.
추천딱지에 혹했지만 굴은 굳이 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는데, 그건 주방에서 조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솜씨를 아는 데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러나 굴은 괜찮았는데, 그에 상관없이 내 뱃속에서는 그 뒤 24시간동안 작은 소란이 벌어졌었다.
감자수프에서는 베이컨의 느낌이 살짝 났는데, 베이컨 자체가 조금 부족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수프 자체의 온도나 농도, 간은 모두 훌륭했다. 보통 감자수프에 레몬즙 아니면 핫소스와 같은 산을 살짝 뿌려주면 맛이 조금 더 분명해지는데, 그란 쿠스토는 전체적으로 산의 쓰임에 조금 인색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삼치 파스타. 주문을 받은 분이 ‘면은 살짝 씹는 맛이 있게 알 덴테로 나오는 데 괜찮으시겠습니까?’라고 물어봤는데 나는 그냥 좀 웃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가 진짜 알 덴테인지 나는 아직도 잘 감이 안 잡힌다. 집에서 삶을 때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 알 덴테보다도 조금 덜 삶아 먹기도 하니까. 어쨌든, 이 삼치 파스타는 요리 드라마를 가장한 또 하나의 연애드라마 파스타 덕분에 이제는 누구나 알 알리오 올리오를 기본으로 구운 삼치를 곁들인 것이었다. 솔직히 소스를 만든 것이 아니므로 삼치가 파스타 전체에 맛을 불어넣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구운 살치살과 기본에 충실하게 만든 파스타는 참 잘 어울렸다. 간도 잘 맞고, 적당히 뜨거운 듯한 온도도 훌륭했으며 물론 면도 잘 삶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딱 적당한 정도로 익은 마늘이 좋았다. 프로의 세계는 물론 다르겠지만 이 마늘을 태우지 않고 익히는 게 생각보다는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먹은 건 목등심 구이였는데, 고기 자체는 좋았지만 퍽퍽했다. 보통 고기집에서 먹는 정도의 두께이기 때문에 스테이라고 생각하고 익힌다면 그렇게 밖에 익힐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같이 나온 구운 야채들도 괜찮았는데 고기가 얇은 것 한 덩어리라면 그런 야채들보다 신맛이 좀 두드러지게 버무린 새싹채소가 보기에도 풍성하고, 쌉쌀한 맛-특히 완두싹-이 고기와도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식은 파나 코타였는데 식감 훌륭했고, 단맛도 딱 적당한 주준이었다. 다만 엎어놓았을 때 바닥, 즉 틀에 넣었을 때 윗부분에 껍질이 생겨있어서 이에 붙거나 질긴 느낌이 있었다. 랩으로 덮어 씌워서 굳히면 안 생긴다고 알고 있는데… 위에 얹은 컴포트는 잼인데 진짜 콤포트인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잼으로 만든 것 같다는 느낌이 좀 강했다. 비용은 좀 들겠지만 제철 과일로 콤포트를 해서 한 숟가락씩만 얹으면 잘 만든 파나코타와 더 격이 잘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커피 역시 좋았다.
집에서 음식을 꾸역꾸역 만들어 먹는 게 언제나 즐겁지는 않다.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건 밖에 나가기 귀찮거나 또 실패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서 만들 수 있는 음식에는 한계가 있다. 일단 불이 약한 것부터가 문제이다. 은근한 불에 오래 끓이는 음식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조리시간은 짧을 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먹은 파스타는 기술이 좋더라도 집의 가스렌지로는 정확하게 흉내내기 쉽지 않다. 집 근처에 이런 음식점이 좀 있어서 집에서 음식을 하고 싶지 않고, 좀 잘 만들어진 양식을 먹고 싶을때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집에는 엄청난 컨셉트며 멋진 이름 같은 건 없지만 음식을 만들면서 기본기라고 생각되는 모든 요인들이 비교적 깔끔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이 정도만 된다면 음식점에 크게 바랄 것이 없겠다. 무슨 비스트로니, 어디 출신이니 이런 것들이 먼저 앞에 나오고 그 뒤에 그보다 못한 음식이 나오는 집들보다는 훨씬 낫다.
사족
1. 공간 자체는 괜찮은데 아주머니 손님들이 많아서 전반적으로 좀 시끄럽다.
2. 네이버를 뒤져보면 서비스에 대한 얘기도 나오던데 딱히 나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 by bluexmas | 2010/02/19 09:00 | Taste | 트랙백 | 덧글(16)
비공개 덧글입니다.
저는 이탈리아니 프랑스니 이런 걸 떠나서 기본적으로 잘 조리된 음식이 좋더라구요. 간 잘 맞고, 파스타면 면 잘 삶고… 그 정도면 좋아요. 삼치는 고등어보다는 살이 훨씬 부드러워서 조리하기에도 어렵다고 생각해요. 몇 번 사다가 조려봤는데 그게 맞는 조리법이 아닌 것 같더라구요.
저도 음식에 관련된 글 쓰는 게 즐거운데 너무 양이 많아서 괴로울 때도 있어요.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 가지고 있지요^^
–> 쓰고보니 삼치는 저 위에 일착으로 있군요; 이런 해태눈 T.T
한 십댓년전쯤 저도 그런 비슷한 일이 있었죠.
얼마나 놀래셨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