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집게 정 아무개 선생님

.어딘가에 쓴 기억이 안 나는데 마치 쓴 것만 같다는 느낌의 기억 한 가지.

중학교 1학년때, 국어를 가르치던 정 아무개라는 선생님이 있었다. 같이 붙어있던 고등학교에서 내려온 사람이었는데 땅땅한 체격에 뒤로 말끔하게 넘긴 머리모양과 잘 어울리는 금테안경까지, 적당히 품위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여간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고, 첫 시험 직전 이 양반이 예상 문제를 한 번 짚어보자고 시험지를 한 장 들고 와서는 그걸로 일종의 문답시간을 가졌었는데 나중에 시험지를 받아보니, 그게 바로 시험문제였던 것이었다. 그때는 보통 스물 다섯 문제씩 시험을 보았었던가? 하여간 그 가운데 한두개를 빼놓고는 “예상”문제라고 했던 문제들이 그래도 나왔는데 나는 워낙 허둥대는 어린이였던지라 뭔가를 기억하지 못했는지 헛갈렸는지 아마 한 두개 정도를 틀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그 정 아무개 선생님은 시험 직전만 되면 “예상”문제를 풀어보는 시간을 가졌고, 학생들은 모두 족집게 선생님의 신통력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문답시간만을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8절 시험지에 쭉 써서 들고 다니면서 보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반을 가르치는 국어 선생과 복도에서 마주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갑자기 내 손에 들린 시험지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궁금했는지 나꿔채서 들여다보았고, 거기에는 아마도 “예상”문제가 있었겠지? 이제는 20년도 더 된 일-앗 시간이 그렇게 오래 흘렀구나T_T-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그는 나에게 그 문제들의 출처를 물었고 나는 저희 선생님은 시험 때면 이런 “예상”문제들을 풀어주세요, 대답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뒤에 정확하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 다음해, 아니면 다음해에 정 아무개 선생님이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 말고는.

 by bluexmas | 2010/02/06 15:18 | Life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by 당고 at 2010/02/06 15:31 

뭔가 최근의 토익 문제 유출 사건이 연상되는?^^;

bluexmas 님은 본의 아니게 내부고발자가 되셨다는? ㅋ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2/06 22:22

앗 정말 우연이었어요T_T 저는 왜 그랬을까요 정말…

 Commented by 펠로우 at 2010/02/06 21:00 

아니, 그 시절에 왜 그리 센스가 없으셨는지요;; 정직한 정면돌파가 장기레이스 인생에서 속편하긴 하죠^^;;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2/06 22:23

앗 그게 같이 문제를 출제하니 내용만 보고도 벌써 눈치를 챘지 않았을까요…;;;

정직한 정면돌파가 장기레이스 인생에서 속편하다는 말씀에는 동감합니다;;;

 Commented by F모C™ at 2010/02/07 00:36 

고등학교 때(열여섯™인데 웬? 이라고 하시면 저는 열여섯이 아니라 열여섯™이니까 괜찮다고 우깁니다 술도 마시는데요 뭘 오호호호홋(/ㅅ)/) 프랑스어는 프린트 나눠주고 거기서만 출제된다고 했는데 귀찮아서 그 프린트도 안보고 늘 점수가 바닥을 기었던 기억이 났는데.. 프랑스어교사는 한학년에 한분이었고 전 반에 다 돌렸거든요. 다른 공부나 해라하는 의미였나봐요;

그런데 족집게 정아무개 선생님은 그거랑은 다른 상황이었군요;

 Commented by 잠자는코알라 at 2010/02/07 11:31 

옛날 저희 체육시험문제에 답이 123454321234543.. 이런 식으로 나온 적이 있었어요. 저는 별 의심 없이 믿어서 다 맞았는데 다른 친구들은, 답이 이렇게 장난처럼 나오는게 이상하다며 다시 풀어서 다 틀리고.. 그때 항의가 장난 아니었답니다. 저같아도 블루마스님의 그 상황에서는 딱히 둘러댈말도 없고.. 그냥 솔직히 말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