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사미로 끝난 성탄맞이 먹부림 마라톤
뭐 굳이 성탄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일을 전폐하고 만들기와 먹기 마라톤을 했다. 원래의 계획은 좀 창대해서, 늦은 아침부터 시작해서 해 질 때까지 전채부터 수프와 파스타, 주요리, 그리고 디저트 3종 세트와 마지막의 ‘digestivo’에 중간중간 ‘palate cleaser’까지 먹는, mission: impossible수준의 먹부림이었다. 결국 뭐, 그 순서를 따라서 다 먹기는 했지만, 너무 힘들었던 데다가 과도한 크림 섭취로 느글거리는 속을 감당할 수 없었던 바, 앞으로 이렇게 의미없이 노동집약적인 먹부림 마라톤을 또 할지는 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일단 생각했던 음식과 순서. 안 만들어 보았던 것을 만드는 모험은 감행하지 않았고, 예전에 적어도 한 번씩은 만들어보았던 것들을 이리저리 짜맞춰서 상을 차리기로 했다. 그 전에 미리 아이스크림 몇 가지를 만들어 두었고, 또 다 마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음식마다 포도주를 대강 짝 맞춰 보고자 싸구려부터 그래도 몇 푼 하는 것까지 포도주도 준비해놓았다. 조리법에 대해서 말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이 글에서는 조리법에 대한 얘기는 안 한다. 기회가 되면 그건 따로 글을 쓰기로 하고…
가장 먼저 먹은 건, 예전에 만들었던 애호박 크루도에 새우도 같이 버무린 것. 새우의 머리를 떼어내고 생강과 레몬즙에 재운 뒤, 소금구이를 해서 껍데기를 벗겼다. 식전주로 가지고 있던 프로세코를 땄다.
참, 플란다스의 개에서 만화빵을 한 덩어리 더 협찬 받았다…
뒤를 따른 감자 파 수프와 로즈마리버터 토스트. 막말로 영계라는 걸 한마리 사서 삶아 고기는 먹고, 국물은 음식 만드는 바탕으로 썼는데, 무슨 영계의 가슴살이 그렇게 질긴지-_-;;;; 내가 너무 오래 삶은걸까. 덴마크의 사워크림은 진짜 셔서 사워크림으로는 실격. 그냥 크림 많이 든 요거트라는 것이 덴마크 사워 크림의 정체다. 여기에서부터 싸구려 샤르도네이를 한 병 땄는데, 그렇게 좁고 신 샤르도네이는 처음 먹어봤다-_-;;;
파스타는 전에 먹고 남은 통밀 생면에 두 가지 색깔의 작은 토마토+박하+크림소스. 뭐 그럭저럭…
보니까 비싼 식당들에서는 중간중간 입 씻으라고 과일 셔벳을 내오던데, 셔벳 만들기는 귀찮아서 흉내낸답시고 그라니타를 만들었다. 이건 사과 레몬 그라티나.
주요리… 말많고 탈많은 자투리 이마트 싸구려 소갈비로 흉내만 낸 오소 부코. 한 병에 6,900원짜리 이마트의 G7 메를로를 사서 마시고 또 넣었다. 폴렌타를 만들고 싶었으나 실수로 빵에 넣는 옥수수가루를 사서, 폴렌타가 알갱이 없는 풀이 되었다. 벌써 여기에서 지쳐서 음식의 때깔이 어째 괴기스럽다. 파슬리를 사왔다면 그레몰라타를 만들었을텐데 당연히 없었으므로 되는대로 레몬껍질을 갈아서 얹었다. 안 그러면 너무 느끼할 것 같아서. 저런 종류의 음식은 너무 색이 저래서 사진발이 참 안 받는다.
샐러드는 해남인가 어디의 시금치에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 기름을 살짝 버무린 것. 이 시금치 정말 맛있다.
사실은 오소 부코를 먹을 때에 아끼던 진판델을 한 병 따려 했으나… 벌써 술에 얼큰하게 취해서(그 전날 새벽까지 음식만들면서도 만만치 않게 마셔서…-_-;;;), 일단 이걸로 점심을 마무리짓고, 뻗어버렸다.
이 그라니타는 여름에 담가둔 매실청으로 만든 것인데, 대체 언제 먹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먹기는 먹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아예 저녁으로 차린 후식 3종세트와 그 초라한 차림새.
두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는데, 첫 번째는 크리스마스 색깔을 주제로 삼아보려던 바질-애플민트 아이스크림과 딸기 레몬 설탕 절임. 원래는 바질로만 만드는 조리법이었으나, 그만큼 바질을 따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발육상태 안 좋은 바질들 다 죽일 것 같아서 애플민트를 사서 반 섞었다. 거기에 딸기를 설탕시럽+레몬즙에 살짝 절여 깔아주면 된다.
두 번째 아이스크림은 바닐라를 바탕으로 Holiday Spice를 듬뿍 넣어 만들고, 마지막에 옛날에 남겨 두었던 젖은 피칸을 섞어서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 ‘빠다코코넛’을 흉내내려다가 실패한 통밀 코코넛 크래커를 곁들였다. 통밀 크래커는 꿀로만 단맛을 내는데, 만들고 나니 단맛은 없고 꿀의 뒷끝에 남는 그 특유의 좀 쏘는 듯한 느낌만 남아있었다. 그러나 달지 않은 것이 지나치게 달게 된 아이스크림과 오히려 맞았다. 바닥에 깔려 있는 진창 같은 크림은 초콜렛 크림 앙글레이즈…라고 말하고 싶으나 전자렌지에 초콜렛을 대강 녹여 만들었더니 그 색이 참 시궁창스러웠다-_-;;;
세 번째는 젤라틴으로 살짝 굳히는 발로나 다크 초콜릿 무스와 레몬 앤젤 푸드 케이크. 언제나 크림을 좀 많이 올리는 나쁜 버릇이 있어 무스가 좀 떡졌고, 앤젤 푸드 케이크는 마이클 룰만의 새 책에 나오는 조리법을 한 번 시험삼아 써 봤으나 너무 찐득찐득하고 달아서 믿음이 떨어졌다. 옛날에 버리기 아까운 노른자로 만들어 둔 레몬 커드가 있어서 꺼내 써 봤는데, 오래 되어서 기름이 완전히 분리되어 토 쏠리는 맛이어서 바닥에 깔았다가 이내 긁어냈으며, 생크림은 너무 올려서 덩어리에다가 저 거대한 케이크 덩어리는… 너무 오래 먹부림을 했더니 지쳐서 막판에는 저렇게 용두사미꼴로 정말 몰골이 흉악한 정체불명의 무엇인가가 내 손을 거쳐 나왔고 발로나 초콜릿을 썼다고 발로나 만들어 댄듯한 느낌의 음식이 나오는 것은 아닌데 참 몰골이 흉악하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계획은 거창했으나 젤라틴이 오래되어서 그랬는지 굳지 않아 실패한 블랙티 젤리를 넣은 보드카. 귀찮아서 젤라틴을 계량하지 않고 만들면 꼭 굳지 않은 젤리가 나온다… 내가 미국을 뜨기 직전에 남부에서 사람들이 많이 마시는, 엄청나게 단 티를 섞은 보드카가 막 시장에 나와 잘 팔렸는데, 그걸 어설프게 흉내내려고 아주 단 젤리를 만들어 보드카에 띄우고 같이 마시면 좀 달고 쓴 맛의 센 술이 목구멍을 쭈우욱 타고 내려가도록 계획했으나… 실패했다T_T
뭐 이렇게 그렇게 의미가 없어 보이는 먹부림을 끝냈는데, 솔직히 너무 무리를 해서 마지막에는 정말 발로 만든 것 같은 차림새가 쭉쭉 나와서 좀 슬펐다. 앞으로는 가짓수를 좀 줄여야 할 듯… 그리고 크래커나 앤젤 푸드 케이크의 조리법은 좀 보완을 해야 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다 먹고 느글거림에 속을 부여잡고 밤새 몸부림을 쳤다-_-;;;
크리스마스, 먹부림, 디저트, 아이스크림, 파스타, 빵, 샐러드, 와인
# by bluexmas | 2009/12/26 15:32 | Taste | 트랙백 | 덧글(62)
환상적인 먹부림에 동참하고 싶다.
저도 초대받고 싶네요ㅎㅎ
비공개 덧글입니다.
왠지 블루마스님의 레서피북은 그대로 출판해도 될 정도로 깔끔히 정리되어 있을 것 같아요
해풍 맞고 자란 것들은 하나같이 맛있죠..간이라도 배어서 그런 것일까요 흐흐-_;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침줄줄 ㅠ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 즐거운 걸요 ㅎㅎ
어쨌든 모양새는 정말 대단해보이네요~
비공개 덧글입니다.
하하, 사실 저는 비밀시식단결사단이 좀 있습니다…
정말 디저트를 코스로 우와+ㅁ+
전 중간중간 모르는 말도 나오고..아 너무 멋진 마라톤이네요 🙂
한국올때 10개나 사들고 들어와서 아껴아껴먹었어요
‘Epoisses’ 이거 혹시 기회되면 드셔보세요 썩 괜찮답니다 🙂
실패하셨다지만;; 엄청나게 단 젤리를 띄운 보드카 신선한대요???ㅋㅋ 엄청나게 단 티를 섞은 보드카도 무슨맛인지 궁금하고ㅎㅎ 설탕이나 단맛을 넣어서 단티를 섞는건지 향자체가 달콤한 티를 섞는건지 궁금해요ㅎㅅㅎ;;; 해먹어보고 싶어서ㅎㅎㅎ 게다가 지금 이것저것 쟁여둔 술을 먹으며 보고있거든요ㅋㅋ
미국 남부에서는 엄청나게 단 스윗 티를 많이 마셔요. 설탕은 물에 안녹으니까 보통 설탕과 물을 1:1로섞은 시럽을 넣죠. 그걸 이용해서 보드카를 내놓더라구요. 그걸 마셔봤어야 되는데…T_T
혼자 먹을때도 잘 차려놓고 먹어야한다고들 하고,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게을러서 영 그렇게 되질 않네요,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대단하십니다;ㅁ;b
잘 차려먹을 필요까지는 없지만, 영양균형이 맞게 먹는 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덧글 타고 왔는데, 오자마자 눈 돌아가네요 @_@!
순간 지난 여름에 혼자 먹고 죽어보자고 간 오사카 여행이 오버랩됐어요.;
맛있지만 괴로운;?
아니면 괴롭지만 맛있는;;?
솔직히 저는 먹는 것보다는 만드는 게 덜 힘들어요. 많이 먹으면 힘들어서요.
오사카는.. 대표적인게 타코야끼랑 오코노미야끼겠지만
딱히 뭐라고 지정한다기 보단 그냥 이것저것 맛있는게 많습니다.
바로 옆동네 교토랑 고베까지 합하면 최소 한달은 눌러있어야 할지도요..?
2월쯤에 가신다면 홋카이도 가셔서 유끼 마쯔리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고,
짧게 가신다면 오사카 식도락 여행이나 후쿠오카 방면의 온천 여행도 괜찮을 것 같아요.
유유자적하게 다녀오시려면 교토를 메인으로 한 간사이지방도 추천드려요.
앗, 쓰고보니 무슨 여행 플래너 같네요.
저는 먹는 것도, 만드는 것도 다 좋아합니다. 설거지만 남이 해주면요 ^_^…..
맨날 많이 먹고 힘들어서 헉헉대지만 그래도 또 많이 먹는 걸 보면 그냥 바보일지도;
저도 설겆이 싫어하는데, 중간중간 아예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는 내공을 쌓았습니다;;; 먹는 건 언제나 좀 버거워요. 만드는 게 더 좋더라구요;;;;
정말로 혹시, 요리를 직업으로 하셨나요? 전 그게 제일 궁금해요.
아니시라면, 어쩜, 어쩜 이럴 수 있어요?
부럽기도하고, 놀랍기도하고..
뒤에 카드도 예뻐요.
그냥 어두웠던 시절에 집에서 하루에 다섯 시간씩 술 마셔 가면서 음식 만들던 시절이 있어서요 🙂
스크롤을 내리는게 이렇게 괴로운 일일 줄이야…;;
정말 맛있겠어요!!!!!!!
몰래몰래 다니다가 낚여서 덧글 남깁니다.
모든 음식이 놀랍지만, 특히 파스타와 향신료 아이스크림에 눈이 번쩍 🙂
그런데 저의 머리속엔 왜 산타모자가 선명하게 박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