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

스무살 때까지 수원에서 살았는데,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성당에 꽤 오랬동안 다녔어요.

라는 처음 한 마디를 듣자,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누구고, 또 무슨 얘기를 할 것이라는 것까지. 그리고 그건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나의 예상처럼 그가 누구라는 것은 맞추었지만, 그가 꺼낸 이야기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등장인물은 똑같았으니 반의 반만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아닌 상대방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그렇다, 나는 한때 그 사람을 알았던 적이 있다. 우리는 아주 잠깐, 그러니까 그와 그 사람이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그 이야기를 만들었던 그 순간에 서로 스쳐지나갔었다. 지금 듣고 있는 그의 이야기가 맞다면, 내가 알았던 적이 있는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 셈이고, 그 반대라면 또 그 반대인 셈일텐데,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그 둘 가운데 어떤 것도 진짜 벌어졌던 일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죄처럼 모순을 지니고 있고, 그 모순은 정당화의 원동력이다. 이 두 사람 모두, 두 사람 사이에 정말 벌어졌던 일을 기억한다기 보다는, 자신이 그렇게 벌어졌다고 믿고 싶은 환상을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뭐 그렇다고 해도 비난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그러하니까. 문제가 단 한 가지 있다면 그저, 내가 어떠한 우연으로 인해 아주 드물게 이 두 사람을 모두 알게 되었다는 점일 뿐이다. 각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죽을때까지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 둘 모두를 알았으니 나는 이제 그 부분에 있어서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일주일 있다가 깎아낸 새끼손톱만큼도 안되는 행복의 권리를 본의 아니게 빼앗긴 것 같아 기분이 살짝 나빠지려고 했다. 그러나 일단 표정관리가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내가 자신이 읊어댄 이야기에 등장하는 상대방을 알았던 적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분명히 그는 혼란스러워 할 것 같았다. 물론, 그가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기는 했다. 나는 단지 지금 이 순간, 별 무리 없이 흘러가는 현재의 상태에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어떤 계기도 자아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귀찮으니까. 오늘은 잘라낸 새끼손톱만큼 잃은 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 잃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뒤로 돌려 때마침 지나가던 웨이터를 붙들고, 똑같은 걸로 한 잔 더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 짧은 순간동안, 나는 평온을 되찾았다. 그래서요? 기분이 나쁠 때에 그 일을 그대로 읊어대면서 기분 나빴다고 말하는 건, 사실 좀 구태의연한 표현 방법인 것 같기는 해요. 그러면 모두가 다 알게 되잖아, 기분이 나쁜지, 나쁘면 왜 나쁜지. 가끔은 그것도 너무 지루해서 왜 생각났는지도 모를 얘기를 하고 거기에 한 번 그런 얘기를 섞어보기도 해요, 그럼 눈치가 아주 빠른 누군가는 어쩌면 알아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게 재미있어서. 살짝 반말을 섞어보았는데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그는 단지 그런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큼은 벌써 알고 있었다.

 by bluexmas | 2009/11/21 23:19 |  | 트랙백 | 덧글(12)

 Commented by 푸켓몬스터 at 2009/11/22 11:34 

어렵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1/23 00:17

아뇨 뭐 실제로 있었던 일도 아닌데요…

 Commented by 닥슈나이더 at 2009/11/22 11:36 

라쇼몽~!!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1/23 00:18

보지 않아서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실은-_-;;;

 Commented by deathe at 2009/11/22 11:42 

덤불 속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1/23 00:18

그렇죠?

 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09/11/23 00:00 

한 20년 쯤 전에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구해낸 친구가 있는데, 최근에 그 이야기를 하다보니 놀랍게도 거꾸로 자신이 나를 구해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더군요. 너무나 확신에 차 있는지라 어찌 반박할 수도 없었습니다. 각자 맞다, 이러고 말았지요. 내 기억이 틀렸나 의심해야할까 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1/23 00:18

그런 일도 일이지만, 가끔 너무나도 확신에 차 있는 사람들은 참 부럽기까지 하죠. 말씀하신 것처럼 각자 맞다, 고 넘어가는 편이 속편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차 있을 수 있는지는 참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Commented by 푸켓몬스터 at 2009/11/23 00:46

가끔 그런것 때문에 매트릭스 세계에 살고있는게 아닌가 의심이 되기도 하더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1/23 23:21

이 세상도 좀 매트릭스 같을때가 있기는 하죠 정말…-_-;;;

 Commented by cleo at 2009/11/23 09:38 

원래 자기가 믿고 싶은대로 혹은,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선택적으로 저장하는 것이.

인간의 한 특성인거 같습니다만…그 방면으로 탁월한 사람이 신념에 차있기까지 하다면,

대책이 없는거지요.

사회생활 하면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엮이지 않으려고 나름 애는 쓰고있지만,

복병처럼 언제 어디서 출현할 지 모르기에 저도 가끔 그 비슷한 일로 혼자서 속상하다가.

저의 정신건강을 위해 그냥 잊고말자…그럽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1/23 23:21

저는 지난 주에, 8년만에 백분토론을 보고도 그런 비슷한 걸 느꼈어요… 역시 큰 인물이 되려면 뻔뻔스러울줄도 알아야 되는 것 같더라구요-_- 정말 개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잊어야 할 건 잊는게 낫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