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적인 점심 메뉴: 애호박 크루도

.와 브리치즈 무화과잼 샌드위치.

며칠 전에 찌개에 대한 글을 써서는, 점심에 집에 앉아 밥 먹는 얘기를 잠깐 했는데, 그건 그냥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장에서 일하다가 밥을 먹을 텐데, 나만 굉장히 개인적으로 밥을 먹는 것 같아 가끔 그 기분이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옮기고 싶어서였다. 사실 나는 집에서 점심 먹는 걸 이상하게 좋아하고, 또 시간이 있어서 뭔가 만들어 먹을 수 있으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어제 점심은 아주 돌발적으로 만들었다. 일을 하면서 몇몇 블로그를 들여다 보고 있었는데, 마이클 룰만이 거창하게 ‘애호박 크루도’ 라고 사실은 샐러드 사진을 올려 놓은 것을 보았다. 크루도 Crudo는 영어 Crude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뭐 대강 날로 먹는 걸 의미한다. 어쨌든 사진-그의 아내는 사진작가이다-이 너무 맛있어 보였는데, 마침 냉장고에 찌개 끓일때 쓰고 남은 애호박 반 개가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덕분에 바로 부엌으로 달려가지는 않고 걸어가서 내 식대로 호박 크루도, 아니 샐러드를 만들었다.

조리법은, 구구절절이 늘어놓을 필요도 없기 간단하다. 일단 호박을 채칼로 얇게 저며서 소금을 살짝 뿌려 10분 정도 두어 숨을 죽인다. 그 이상 두면 아삭거리는 맛이 너무 없어지니까, 시간을 잘 지키는 게 좋다. 그동안 양념을 준비하는데, 그냥 레몬즙과 올리브기름을 기본으로 마늘, 소금, 후추 등등을 넣으면 된다. 샬럿을 못 구하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이므로, 양파를 같이 갈아 조금 걸쭉한 드레싱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아몬드를 곁들인다. 애호박과 아몬드의 조합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먹어보고나니 그 고소한 맛도 맛이지만, 식감이 적당히 부드러워졌으면서도 여전히 아삭거리는 애호박의 식감 바로 밑에 깔리는 정도의 아삭함을 불어넣어 훌륭했다. 책을 찾아보니 피칸이나 호두와의 조합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사진에는 통아몬드를 갈아서 썼는데, 나중에서야 저민 아몬드를 과자용으로 따로 사다 놓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걸 넣으면 보기가 한층 더 좋았을 것 같다.

말이 긴데, 그냥 이렇게 준비한 재료를 버무리고, 바질을 듬뿍 채 썰어 얹으면 끝이다. 바질의 향이 호박향을 바탕으로 깔고 두드러진다. 기름보다 초 종류를 많이 넣어 물기와 신맛을 강조하면 여름에 좋겠고, 내 것처럼 기름을 많이 넣어 조금 뻑뻑하게 만들면 빵을 곁들여 이런 계절에 술안주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클 룰만의 것처럼 색이 좀 다른 호박을 곁들이거나 피망등 빨간색 고추를 살짝 섞어주면 색깔도 아주 예쁘게 나오겠다.

원래 계획했던 메뉴는 치아바타에 브리치즈와 무화과잼을 넣은 샌드위치여서 그것도 만들어 같이 먹었다. 뺑드빱빠의 치아바타에 냉장고에 있던 브리, 상달프의 무화과잼을 곁들였다. 그때 먹은 까망베르가 까망베르가 아니듯, 브리도 브리가 아니었다. 아무런 느낌도 없고 유지방을 뺀 우유로 만들었다는 표시도 없었는데 기름기가 너무 적어 오븐에 넣어도 녹지도 않았다. 훌륭했다.

 by bluexmas | 2009/10/21 10:31 | Taste | 트랙백(1) | 덧글(20)

 Tracked from nonie’s me2DAY at 2009/10/21 17:53

제목 : nonie의 느낌

오늘 저녁 요리는 요걸로, 일요일날 명동가서는 이거 먹어야지….more

 Commented by 펠로우 at 2009/10/21 11:21 

우리나라에서 호박이 싸고 좋은데, 새우젓이나 소금간만으로 먹기엔 좀 단조롭다는 생각은 해왔습니다. 저도 저렇게 깔끔하게 먹어보고 싶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23 22:47

아주 쉬운데 한 번 직접 만들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호박은 칼로리가 적어서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꽤 여러가지 요리 방법이 잘 받지요.

 Commented by 잠자는코알라 at 2009/10/21 11:38 

ㅠㅠ 애호박 샐러드라니 정말 독특하네요. 맛있을 것 같아요 ^^

바질은 계속 화분에서 영양제 꽂고 귀엽게 자라고 있는 건가요? ㅋㅋ 치아바타에 치즈 끼우니까 진짜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네요 -_-;; 저 어제 홍대 폴앤폴리나에서 치아바타랑 바게뜨 사서 하루 종일 뜯어먹었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23 22:48

네. 그 바질은 맞는데 이제 더 이상 귀엽지는 않아서 조금 더 자라면 저를 잡아먹을지도 모르겠어요

T_T 저는 빵을 요즘 너무 많이 먹어서 조금 줄일까 생각하고 있어요… 탄수화물은 정말;;;

 Commented by 제이 at 2009/10/21 11:40 

남은 치아바타를 햄+수제 무화과잼 으로 모두 먹었는데 ….

캬하T_T 브리치즈도 사올걸 그랬어요. 제가 만든 잼은 껍질이 들어가서 덩어리가 큼직–합니다. 아참 뺑드빱빠에서 초승달모양빵(안에 베이컨 들어간) 맛났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23 22:49

아 직접 만드신 무화과잼 맛있겠네요. 저 브리치즈는 개판이었어요. 지하철 상가에서 영암 무화과라고파는 걸 봤는데, 500그램 정도 한 상자가 만원이라서 그냥 뒤로 물러섰답니다.

 Commented by shortly at 2009/10/21 11:43 

오호 치즈는 어디서 구하신건가요? ^^

샹달프 잼 맛있죠..빵 안좋아라하시는 어머니께서 별로 안좋아하시지만 ㅎㅎㅎ

날 애호박의 맛은 약간 떫었던가.. 생으로 먹기엔 알맞지 않겠다는 느낌이었는데.

한번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23 22:50

치즈는 무슨 덴마크 상표였는데, 아무 맛도 없으니까 사 드시지 마세요^^ 크지 않은 애호박은 그럭저럭 날로도 먹을만 하더라구요. 소금에 살짝 절이면 물기도 빠져서 괜찮구요.

 Commented by 된장오덕 at 2009/10/21 13:58 

흐 맛있겠다 ㅠㅠㅠㅠㅠ 사진이 너무 폭력적으로 맛있게 나왔네요 ㅠ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23 22:50

아이 뭐 그렇다고 호박이 때리기야 하겠어요 ㅠㅠ

 Commented by JUICY at 2009/10/21 14:47 

애호박이라길래, 당연히 애호박찌개나, 애호박반찬인 줄 알았는데 이건 정말 새롭네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23 22:51

네, 저도 애호박을 채썰어서 국수에 비벼먹은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무엇보다 금방 만들어서 더 좋더라구요^^

 Commented by 홈요리튜나 at 2009/10/21 16:34 

밖에서 좋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먹는 것도 좋지만

집에서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식성대로 여유롭게 만끽하는 것이 어느샌가 즐거워졌어요 그래도 블루마스님 요리는 훔쳐먹고 싶어요

구하지 못하는 재료는 많아도 채소나 과일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것이 맛 좋은 듯 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23 22:51

미국은 야채가 비싼게 아니라면 대량생산 때문에 맛도 없고 싱싱하지도 않아요. 그런 면에서는 우리나라 야채 과일이 참 좋지요^^

 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09/10/21 22:45 

애호박을 오이의 한 종류로 이해하는 서양인들이니 날로도 가능하겠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바질과 아몬드라니, 충격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23 22:52

저도 아몬드는 충격이었고, 바질은 없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얹었는데 의외로 잘 어울려서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책을 찾아보니 호박과 바질의 궁합이 좋은 모양이더군요.

 Commented by yuja at 2009/10/22 08:31 

조수로 고용해주셨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대학원 다니면서 시간보다는 마음과 돈의 여유가 없어서 뭔가 (살기 위해 해먹는 것 빼고) 즐겁게 해먹은지도 꽤 됐는데 이거라면 간단히 해먹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건강해보이기도 하네요. 이동네 주키니도 슬슬 끝물인것 같은데 얼른 사다놔야겠어요, 감사.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23 22:53

아 그럼 일단 마늘 한 접부터 좀 까 주셔야… 🙂 정말 이 정도라면 간단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cold cut 이랑 괜찮은 빵, 그리고 치즈에 포도주 한 병이면 금방 술자리 벌어지겠죠?^^

 Commented by 느리작 at 2009/10/23 16:56 

어제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홈메이드 가지피자를 먹다가 가지를 날로 먹는 사람의 얘길 듣고

읭?했는데 애호박도 날로 드시는 걸 보니 -비록 숨을 죽였다지만- 뭔가 새로운 세계가 열린 기분.

그나저나 마지막의 훌륭했다…..가 인상적이네요ㅎ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23 22:54

가지는 아무리 얇게 썰어도 날로 먹기가 좀 어렵던데… 호박을 날로 먹는 것 역시 좀 새롭기는 해요. 그 마지막의 훌륭했다…는 정말;;; 훌륭했지요. 세상에 치즈에서 아무런 맛이 안 나기는 처음. 이건 브리가 아니더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