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함의 밤안개

강남역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모임이 멀리 사는 나 때문에 막을 내린 시간은 열 한시 사 십 오분, 택시기사는 알 수 없는 길을 타서 좌회전 신호를 받지 못해 나의 애간장을 녹였다. 바로 앞에 타서 취기 때문에 돈을 못 내고 있던 아저씨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자정의 막차를 놓칠 수도 있었다. 내가 대신 돈을 내주고 싶었다.

막차인지라 차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나는 굳이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을 때에는 남자보다 여자 옆에 앉는 걸 더 좋아하는데, 그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이유에다가 여자가 술에 취해있을 확률이 더 적고 허벅지가 덜 굵어서 굳이 내 자리까지 침범할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같은 남자들에게 대단히 미안하기는 하지만, 냄새가 안 날 확률도 훨씬 더 적고. 그러나 하나씩 빈 자리 옆에는 거의 모두가 남자였고, 나는 그들 가운데 허벅지가 가장 덜 굵게 생긴 정장 남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왠지 얼굴만 보고 허벅지가 굵은지 덜 굵은지 지레짐작했던 것이 속으로만 미안해서 가급적이면 그의 얼굴을 다시 보지 않으려고 앞좌석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옆으로 흘끔흘끔 그의 눌린 옆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짧게 친 옆머리였는데, 안경을 오래 쓴 듯 눌린 자국이 뚜렸했다. 나는 그 자국에 대해서 잘 안다. 아마도 남자는 안경을 꽤나 오랫동안 썼을 것이다. 문신은 꼭 새기고 싶어 어디엔가 가서 돈을 주고 하트를 그려야만 문신이 아니다. 이런 것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문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의식적으로, 금전적으로 새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결국 지워지지 않는다. 문신의 근원이 상처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양재동 시민의 숲 앞에서 오산으로 향하는 마지막 승객이 올라탔다. 여자였다. 나처럼 막차를 놓고 발을 동동 구르지는 않았는지, 막차를 타는 사람치고 얼굴이 유난히 덤덤해보였다. 그러나 나는 자정이 넘은 시간 사람이 없는 숲 앞에서 만에 하나 안 올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이 어찌 그렇게 덤덤할 수 있는지 너무 궁금해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 여자에게 오늘 하루는 어땠던 거에요? 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기에 너무 덜 미쳤고, 술 역시 그렇게 취하도록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밤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때때로 대담해진다. 어둠이 사람들이 가질법한 나에 대한 기억을 씻어가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꼭 그 사람이 덤덤해보이고 꼭 그 사람이 여자라고 해서 뜬금없이, 오늘 하루는 어땠던 거에요? 라고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 지구적인 평화까지 신경쓸만한 위인은 절대 아니지만,  나에게는 그저 같은 막차를 타고 같은 시골구석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평화와 안녕에 대해서만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 사십 여분의 짧은 시간동안 물어보고 싶은만큼의 대담함이 있었다. 그러나 버스는 아주 어둡게 등을 밝히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느라 정신없어 보여서 나는 그들의 잠을 깨우기 싫어서라도 나의 대담함을 억누를 수 밖에 없었다.

버스가 내가 살고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도시의 도로 위로 접어들자, 나는 내가 살고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없으면서도 정말 내가 집합체로서 저렇게 난잡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도시에 살고 있다고 믿기가 어려웠다.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잠시마나 밤의 힘을 입어 지니고 있었던 안개같은 대담함이 유체이탈을 하듯 스르륵, 내 몸을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고속버스는 열리는 창문 하나도 없는 밀폐된 공간이므로 그렇게 내 몸을 빠져나간 대담함이 다른 누군가의 몸으로 다시 스르륵, 들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대담함을 삼키고 자신의 보금자리로 떠나는 사람의 안녕을, 대담함이 사라졌으므로 속으로만 가느다랗게 빌었다. 버스는 곧 역 앞에 도착했고, 나는 내 몸을 길바닥으로 던졌다. 눈 앞이 안개라도 낀 것처럼 희뿌얬다. 가로등은 오로지 물리적인 어둠만을 밝히기 위해 길거리에 그렇게 무심하게 서 있었다. 그들이 오늘따라 더 미웠다. 사람이, 아니면 그저 내가 가로등도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집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by bluexmas | 2009/09/30 01:28 |  | 트랙백 | 덧글(14)

 Commented by 펠로우 at 2009/09/30 01:33 

저도 비슷한 이유로 어지간하면 여자 옆에 앉습니다. 남자 중에선 불쾌한 냄새 나는 사람이 의외로 많더군요;; 개인적으로 정장 남자는 가급적 피합니다. 회식을 해서 김치+술냄새가 날 확률이, 혹은 정장이란 핑계로 옷을 빨지않아 냄새날 확률이 더 높은 듯 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9/30 23:48

네, 그러나 어떤 여자분들은 옆에 남자가 앉는 걸 또 좀 꺼리는 눈치도 보여서 제가 좀 그럴 때도 있지요.

정장이라는 핑게로 옷을 빨지 않아…라는 부분에서는 슬프지만 또 공감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정장을 너무 적게 가지고 있으면 좀 애로가 있지요…

 Commented by 푸켓몬스터 at 2009/09/30 01:53 

저는 여자가 저한테 전화번호 물어볼까봐 남자들 옆에만 앉는편이죠…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9/30 23:48

역시 잘생기신 몬스터님 다우시네요^^ 부러워요.

 Commented by 잠자는코알라 at 2009/09/30 10:26 

bluexmas님 너무 글을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제일 좋은 부분은요 그들이 오늘따라 더 미웠다는 부분이에요 -_-;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9/30 23:48

아니에요 민망하네요-_-;;;

 Commented by Joanne at 2009/09/30 12:06 

그러게요, 저도 bluexmas님 글 잘쓰시는거 동감! 글을 읽다 보면 왠지 모른 공감스러움과..암튼. 뭐 그랬다는 ㅎ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9/30 23:48

아니에요 민망하네요(2)-_-;;;;

 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09/09/30 15:27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잘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9/30 23:49

아, 서생님께서 주신 주제로 빨리 글을 써야 되는데, 아니 사실은 썼다가 좀 주저되는 부분이 있어서 마무리를 못 짓고 있어 제가 빚진 기분이 듭니다. 빨리 마무리해서 올릴께요…T_T

 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09/10/01 02:03

이런,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의무사항이 아닌걸요. 그냥 넘어가셔도 아무 일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물론 bluexmas님의 시선이 많이 궁금하기는 합니다. 그 주제가 결코 가볍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상을 피곤하게 할 정도로 하지는 마세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02 10:42

물론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약속은 지켜야지요^^ 계속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쉬운 거리는 아니니까요.

 Commented by 홈요리튜나 at 2009/10/01 15:41 

블루마스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존말코비치되기’처럼 블루마스님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슬로우모션으로 지켜보는 기분이 들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10/02 10:42

그냥 쭈욱 생각하다 보면 저도 가끔 느린동작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