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기억의 도화선
어제는 친구와 월례에 가까운 회동을 가졌다. 일차는 을지로 오구반점에서 맥주와 함께 군만두, 오향장육, 그리고 깐풍기를 먹었고, 택시를 타고 홍대로 장소를 옮겨 지난 번에 가봤는데 음악도, 공간도 마음에 들었던 ‘벨로주(Veloso)’ 에서 포도주 두 병을 마시고 입가심으로 에딩어까지 작은 잔이나마 두 잔이나 마셨다.
한참 즐겁게 친구와 얘기하고 있는데 문으로 낯익은 서양남자가 들어오길래 보니, R이라는 옛날 영어학원 선생이었다. 유학을 떠나기 전 종로 파고다에서 몇 달간 회화를 배운 뒤 막판에 압구정동의 모 어학원에 다녔는데, 그때의 선생이었다. 캐나다 출신이었고, 나름 잘 가르치기도 해서 같이 술도 몇 번 먹고 연락도 주고 받았었다. 그러나 연락이 끊긴지가 7년 정도?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나는 언제나 갈등한다. 아는체를 할까, 말까… 내가 이렇게 갈등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것보다 내가 그 사람들을 기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기억에 남지 않을 존재라서가 아니라, 시간이 오래 지나면 사람들은 당연히 잊혀지는 건데, 나는 어째 그런 사람들을 시간이 오래오래 지나도록 대부분 기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10년 전쯤이라면 나는 지금보다 25% 과체중이어서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의 내가 그때 알았던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가서 아는 체를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다(오늘도 그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 홍대 앞에서).
어떤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의 도화선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뭐 매개체라고 할까? 언젠가 알았던 사람들을 보면,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어떤 시기의 기억이 떠오른다. 일종의 자기보호체계 같은 것이 있는지 평소의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잊고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보면 그런 기억들이 떠오른다. 하물며 만나서 옛날처럼 다시 얘기하면 오죽하겠나… 그러한 이유로 나는 어떤 사람들을 그냥 지나쳐 보내고 싶어진다.
그래서 갈등하다가, 결국은 그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하고, 나중에 한 번 보자고 명함을 건네줬다. 이렇게 우연히 사람을 만나기가 또 쉬운 일은 아니니까, 뭔가 그런 우연이 주는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솔직히 영어 안 한지 백만년이라 영어도 좀 하고 싶었다-_-;;;; 나는 사실 백지가 더 좋다. 돌아올 때에는, 백지인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 by bluexmas | 2009/09/24 00:08 | Life | 트랙백(1) | 덧글(8)
제목 : 연상 작용에 따른 안 잊혀지는 기억…
사람, 기억의 도화선에서 트랙백….저에게 11:11이라는 마법을 걸어버린 아줌마가 있습니다…(지금은 시집가서 애까지 낳았으니 아줌마가 맞다능…)자기는 1일라는 숫자를 되게 좋아하는데…우연히 시계를 봤을때 11:11 일때는 너무 기분이 좋다는 말을 하던 그녀….문제는 이미 10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인데…지금도 시계를 봤을때 11:11 이면 그녀가 생각 난다는…ㅠㅠ;;누구라도 맘속에 그렇게 숨겨둔 기억의 도화선이 되는파……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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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not Balb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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