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멋대로 해라
봤다고? 사람들이 웃지도 않을 것 같다. 언제했는지도 다들 기억못할만한 드라마를 이제서야 봤다고 글을 쓰면.
하지만 꽤 오랫동안 궁금했었다. 그 드라마의 실체가 무엇인지. 내가 우리나라를 떠난 뒤에 방영되었고 인기가 폭발적이었는지 그때 유행하던 싸이홈피 백 군데를 가면 적어도 90군데에서는 화면 갈무리며 대사 등등을 볼 수 있었던데다가, 내가 좋아하는 3호선 버터플라이의 노래가 삽입되었다고 해서 대체 어떤 드라마인지 알고 싶었다. 결국 이제서야 기회가 닿아서 보게 된 것이다.
뭐라고 말을 늘어놓기 전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실망했다. 일단 가장 큰 이유는, 나는 그 노래가 드라마에서 주제곡처럼 쓰인다고 해서 이나영이 정말 제대로 음악을 하는 등장인물일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드라마를 보니 이나영은 음악을 하든 떡을 썰든 고기를 굽든, 그가 하는 일이 등장인물의 성격이며 행동에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었다. 게다가 더 싫었던 것은, 그렇게 설정된 음악하는 사람으로서의 이나영은 우리나라 대중매체에서 가장 흔하고 또 기분 나쁜 방식으로 정형화(stereotyping)한 등장인물이라는 점이다. ‘미완성 밴드’ 라고 지은 이름조차 구태의연하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들의 자켓을 보아도 완전히 80년대 정도에나 유행했을 법한 자켓과 꾸밈새더라. 아니, 칠 년이 지났어도 2002년이면 우리나라 인디 음악계 활동도 왕성했을텐데, 어떻게 그 따위로 대중음악도 아니고 인디 음악쯤 하는 사람이며 밴드를 묘사할 수가 있었을까? 게다가 그 밴드는 모여서 노가리까거나 싸우기 바쁠 뿐, 노래는 거의 들려주지도 않는다. 앨범을 냈지만 밴드는 이나영와 양동근의 신파지랄에 휩쓸려 뭔가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렇게 쓰려면 대체 밴드로 설정은 뭐하러 하나, 차라리 무슨 식당에서 일하거나 아예 무직 백수건달로 처리하지. 게다가 남자주인공인 양동근의 스턴트가 꽤 만만치 않은 비중으로 나오는 것과 비교해보자면 정말, 여자주인공은 왜 그렇게 설정했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막말로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집안 출신이라 착하고 순진하지면 별로 개념은 없는 여자애일뿐인데, 굳이 음악을 시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냥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못내 씁쓸했다.
그리고 사랑을 다룬 드라마에다가 대고 그 사랑이 별 볼일 없었다고 얘기하면 드라마 자체의 존재 의미를 거부한다고 말하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겠지만, 솔직히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물론 이것은 ‘네 멋대로 해라’ 보다 더 상투적인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가 공해처럼 이 땅을 덮은지가 백 년쯤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마당에 저 드라마는 뭔가 좀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기 때문에 품게 되는 생각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정말 무슨 사랑을 보여주고 싶길래 뇌종양에 걸린 소매치기를 주인공을 설정해서 놓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마저 자살하게 만든 다음에 수술실로 들여보냈던 것인지, 나는 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나는, 드라마를 보다보다 화가 치밀어 올라서, 거의 끝에서 양동근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 그냥 죽어버리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래야 드라마가 제대로 드라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드라마는 쓸데없는 희망만을 거듭해서 보여주려고 하나? 아무리 알고도 속는 것이 드라마의 상투성이라지만, 뭔가 좀 있어보이고 또 달라보이게 만들기 위해 그런 식으로 설정해서 다들 어딘가 나사 빠진 사람들처럼 말하는 등장인물들을 내세워 드라마를 이끌어갈려면, 차라리 엉뚱하게 희망 따위 불어 넣으려 하지 않고 그냥 두 사람이 내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살아서 확 태워버리고 죽게 만들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사실 나는, 마지막에서 양동근이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서성거리던 장면에서도 그냥 병원을 뛰쳐나와 도망가는 것으로 끝을 맺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나영은 요즘도 연기를 하나? 어디 커피 광고 같은데에 나오는 건 좀 보았는데, 드라마 막판으로 가서는 정말 연기를 보아주기가 좀 힘들었다. 막판에는 아무런 대책 없는 어린애처럼 울기만 하는데, 정말 못봐주겠더라. 거기에다가 이젠 얼굴만 봐도 까칠함이 울컥 느껴지는 윤여정이 더 까칠한 목소리로 ‘이런 게 연기인 거야’ 라는 냄새를 풍기는데 그것도 역시 별로… 그나마 정말 의외로 언제나 느끼하기만 한 이세창이 느끼해도 그 바닥에 숨겨놓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등장인물로 나와 가장 돋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끌고 가기가 힘들테니 좀 덧붙이자고 군데군데 깔아놓은 이나영 엄마의 과거와 오빠 출생의 비밀 따위의 이야기는 전부 불필요한 쓰레기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 사실들을 알고도 표정도, 어투도 별로 변하지 않으며 생각도 감정도 없어보이는 대사를 툭툭 내뱉는 이나영을 보고 있으려니, 가족에게 감정이 저렇도록 설정된 사람이 참 사랑은 자기 돈 훔쳐서 가까운 사람마저 죽게 만든 사람하고 뜨겁게 할까 싶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드라마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모든 게 내 잘못이다. 결국 나는 이 드라마를 기대만 하고 절대 보지 말았어야 했다. 무엇인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지만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인데, 다른 드라마와 똑같다면 보았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 by bluexmas | 2009/09/20 20:18 | Media | 트랙백 | 덧글(14)
양동근이 상추쌈 먹다가 바깥에 뛰쳐나가서 막 울때 그때 양동근도 울고, 하늘도 울고, 저도 울었습니다.-_ㅠ;;;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서 바로 보도통제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bluexmas/ <네멋>의 작가 인정옥이 더 아낀다는 드라마는 <아일랜드>입니다. 네멋은 초기의 신선함보다 이제는 향수에 가까운 정서가 느껴지긴 해요. 좋아했지만 마니아의 범주에 속하지 않던 저로선 아일랜드처럼 두고 두고 다시 볼 정도의 열병은 없어요. 그래도 작가가 감독과 싸워가며 “남자랑 자봤다”는 대사를 지켜내야 했을 정도로 지금보다 더 통속적인 드라마 여주인공이 판을 칠 때에, ‘감초’로 등장할 법한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건 의미가 있고.. 그런 의미만 있다기엔 또 뭔가 아쉬운..
사실 저는 거의 모든 드라마를 혐오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시각에서 보아서 멀쩡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이 드라마에 대한 저의 평 역시 뭐 별로 신경 쓰실만한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신파지랄에 ……………………………………아놔 그간의 감동이 파파파파파팍 웃겨지네요. 아일랜드도 좀 신파지랄이에요. ㅎㅎㅎ 전 현빈-_-이 좋아서 봤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