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음식점을 향한 잠재적인 삼고초려

분당선이 선릉에 도착하니 한 시 사십 오 분쯤이었다. 정신없이 서두른 아침이었다. 늦게 잤는데 생각보다 늦게 일어났다. 버스를 타고 야탑을 거쳐 오리역 근처의 단골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자르기로 했는데, 버스 시간 오십 분 전에야 일어났던 것이었다. 미친 듯이 서둘러서 버스를 탔는데, 지갑을 보니 카드를 안 가지고 나왔다. 역시 서두르면 꼭 뭔가가 어그러진다. 카드 없이 돌아다닐 하루를 생각하니 갑자기 집에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러나 꾸역꾸역 발걸음을 재촉한다. 다행스럽게도 전화기에 교통카드 기능이 있으니 일단 거기에 돈을 충전하는 것으로 카드가 없을 때에 생기는 불편함의 반은 덜 수 있다. 머리를 자르고 다시 분당선을 탔던 것이었다. 어쨌든 약속시간은 세 시. 뭘 먹지? 생각하면서 일단 삼성역쪽으로 향하는 이호선을 기다리는데, 역삼역의 산#교자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난 번에 한참을 찾아서 갔더니 일요일이어서 헛탕을 쳤던 그 집, 오늘은 월요일이고 약속시간까지는 거기 들러 밥을 먹고 갈 시간은 있어 보였다. 게다가 식당이 있는 길 건너편에서 백 사십 몇 번인가를 타면 약속장소 근처까지는 간다. 이래저래 딱 맞겠다 싶어 잽싸게 계단을 걸어 내려가, 반대쪽 승강장으로 향한다. 마침 지하철이 문을 열고 막 사람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어째 채 시작도 안 한 하루가 매끄럽겠다 싶었다.

그러나 매끄러움은 딱 거기까지였다. 역삼역에서 쭐레쭐레 걸어가서 식당에 도착하니, 문은 열려있는데 들어가서 앉으려니 장사를 안 하는 시간이란다. 음식 만드는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나? 그럼 왜 문은 열어놓냐고 따지니까 불은 꺼놨지 않았냐고 반박한다. 어차피 내부의 구조는 밖에서 불을 끄나 안 끄나 알 수 없도록 되어있으니, 내가 알 게 뭐냐. 어쨌든 점심을 먹지 못하고 돌아선다.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게 또 안 온다. 그걸 타면 안세병원 사거리에서 내려 평양면옥에 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오지 않는다. 꽤 오랫동안 기다리니 노란 순환버스가 오는데, 노선도를 보니 강남구청역으로 간다고.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이런 상황이면 안세병원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도 점심을 제대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어쨌든 약속장소 근처에 가서 해결을 하든지 말든지 하기로 하고 노란 버스를 탄다. 그런데 원래 타기로 했던 버스가 바로 쫓아왔는지, 역삼역 사거리에서 우회전 하는 노란 버스 뒤로 바로 지나간다. 그리고 이 버스는 한없이 돌아가는 길만을 타서, 강남구청역에 도착하니 약속장소에 걸어가면 딱 맞을 정도의 시간 밖에는 안 남았다. 말을 많이 하려면 뭔가 먹어줘야 되는데, 시간도 시간이지만 먹고 싶은 것도 없다. 만두와 김밥을 좋아하지만, 어째 체인점에서 파는 건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길가의 이동통신사 대리점 직원들이 가게 안에서 만두와 김밥으로 점심을 먹는 광경을 보게 된다. 둘 다 너무 맛 없어 보여서, 그러느니 안 먹겠다고 생각하고 계속 걷는다. 편의점에서 무슨 스낵 바 따위를 사서, 건널목에서 파란 불을 기다리며 씹는데 어째 맛이 참으로 인공스럽다. 그래도 약속 시간에는 안 늦는 게 낫다. 처음에는 일요일에 문 닫는 걸 모르는 내 잘못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아예 문을 닫지도 않고서 사람을 나가라고 그러는 식당에 음식을 먹으러 세 번까지 가야 되는 걸까? 건널목을 건너면서 계속 그 생각만을 했다. 음식점을 위한 삼고초려라니, 어째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일을 마치고 난 다음에는 압구정동 길거리를 한참동안 걸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어떤 얘기들을 하고 나면, 바로 집으로 향하는 것보다는 조금 시간을 보내서 그 상황에서 생긴 감정들을,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거나 조금 털어내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에 와서도 그 감정에 사로잡혀 같은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거나 늘 하던 일들을 하지 못하고 집안을 서성거리다가 잠을 청하는 경우가 많다. 매일매일은 소중하고, 따라서 그런 식으로 집에서 있는 시간을 보내면 안된다. 게다가 나는 내일도 밖에 나가야 한다. 더위가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땀은 여전히 흘렀고 차가 가득한 거리는 답답했다. 내친 김에 안세병원 사거리까지 걸어가, 점심에 먹으려던 냉면을 먹었다. 어차피 배가 고팠으므로 만두와 냉면을 모두 먹으려고 주문을 하고 이층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 왔더니, 돈을 받는 주인으로 보이는 듯한 아저씨가 혼자 오는 손님들은 양이 많아서 다 못 먹으므로 만두는 반만 주문을 넣었다고 의외로 친절하게 얘기해주신다. 그러고 보니 메뉴에 ‘만두반’ 이라고 써 있었는데, 나는 그게 만두와 밥이 나와서 만두반인줄 알고 있었다. 그래봐야 만두가 겨우 여섯 개였을텐데, 점심도 안 먹었으니 다 먹기는 먹었을 것이다. 어쨌든 만두가 먼저 나오고 곧 냉면이 나왔는데, 만두도 냉면도 참으로 둥글둥글했다. 이런 날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하고 나서 머릿 속이 복잡해진 데다가 점심도 안 먹어 엄청나게 허기진 상황에 맵고 뜨거운 음식을 먹었더라면, 나는 또 얼마나 속으로 짜증을 냈을까, 생각하며 둥글둥글한 만두를 집어먹고, 역시 둥글둥글한 냉면을 국물까지 다 마셨다. 늘 정해진 종류의 사람들과 정해진 종류의 얘기만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잘 모르는 사람들과 하지 않았던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안 터져야 하는 물꼬가 터지는 경우가 가끔 있고 쏟아져 나와서는 안 될 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게 언제나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때로 나는 좀 아껴둬야만 한다. 다 드러내놓고 쏟아내놓고 집에 돌아와서 나 혼자 앉아 있노라면 스스로가 애초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그러면 가뜩이나 어색한 세상이 더 어색하게 느껴진다. 최소한의 방어막이 필요하다, 나의 세계는 끊임없이 유지되어야 하니까, 적어도 아주 당분간은. 그래서 길을 걸어서 비워야 할 것들을 비우고 돌아온다. 너무 많은 것을 안고 돌아오면, 나의 공간에 회의의 공기가 감돌기 시작하고, 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고맙게도 기사 아저씨는 버스의 불을 껐다. 그렇게 주변이 어두워지니 창밖으로 보이는 늘 뻔하디 뻔한 세상이 그래도 아주 약간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그 속에 다시 섞이고 싶지는 않았다.

 by bluexmas | 2009/08/24 22:50 | Life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by 펠로우 at 2009/08/24 23:06 

전 단순해서 복잡한건 잘 모르겠지만..형편없는 가게를 만나 실망을 하고, 좀 노련한 가게를 만난 후 안정을 찾았단 얘기로 들리네요^^ 틀리면 제가 틀린거구요.

역삼 산동교자는 식사류 볼륨도 없고 비싸죠. 언급하신대로 주방장 근무가 띄엄띄엄해 부재 중인 경우가 많아요. 그냥 평일식사피크 시간에 직장인만 상대하는 그저그런 가게입니다.

평양냉면집엔 ‘만두반’이 되는 곳이 있고 안되는 곳도 있는데, 역시 되는 곳이 돈을 떠나서 스타일은 있죠^^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24 23:09

산동교자에서 음식을 한 번 먹어보려고 했는데, 두 번이나 이런저런 이유도 갔다가 음식을 못 먹고 나니 얼마나 대단하길래 내가 세 번이나 가서 먹어야 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죠. 그러나 저녁에 평양면옥이 괜찮아서 점심을 제대로 못 먹은게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만두 반’ 이 되면 스타일도 스타일이지만 뭔가 살짝 배려하는 듯한 느낌이 있죠. 그러나 전 반 안 팔아도 다 먹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두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