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식당과 기회비용
딱 십 년 전 성탄에, 강남역의 티지아이에서 저녁을 먹는다고 꼴값을 떨었더랬다. 그 때 나는 대학교 삼 학년이었고 그런 종류의 소위 말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외식은 기념일에나 벌어지는, 그야말로 돈을 꽤 쓰는 행위였다, 적어도 나에게는(‘퀘사딜라’ 와 파지타’ 는 예나 지금이나 인기 메뉴였다지?).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지금이라면 절대 가지말아야 할 장소를 절대 가야하지 말아야 할 시기에 갈 정도로 어리석었던 나, 그 때 식당이 예약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식당 앞 공간에는 사람이 가득이었고, 기다렸다가 들어간 식당 안 역시 사람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평소에는 두 사람을 위해 할애했던 탁자를 반으로 쪼개 더 많은 사람을 받아 탁자와 탁자 사이에는 사람이 제대로 지나다닐만한 여유도 없었다. 식당이 평소와 같은 공간배치만 되었어도 사람이 그렇게 많이 들어 북적대지는 않았을테고 또 그렇게 기분이 나빠지는 않았을텐데, 쾌적함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공간에서 음식보다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음을 더 많이, 그것도 그 때의 먹고 사는 형편으로는 비싸서 생일이나 기념일처럼 특별한 날에만 가는 곳에서 먹으려니 기분이 너무나 나빠졌다.
결국 접시를 비워 배는 불렀지만 그만큼 기분이 부르지 못했던 나는, 그날 식당을 나오면서 집어왔던 서비스 만족도 엽서에 나와있던 회사의 대표이사 앞으로 그 날의 부당한 자리배치와 서비스에 의해 상했던 기분을 토로하며 환불을 요청하는 편지를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날 저녁의 영수증과 입금을 위한 통장 복사본과 함께.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갔던 지점의 지점장인가 부지점장인가에게 사과전화를 받고 통장으로 저녁에 썼던 돈 전액을 돌려 받았다. 물론 그 뒤로 다시는 티지아이에 가지 않았다(불과 몇 년 전에 아는 선배를 같은 지점에서 어쩔 수없이 만나 점심을 한 번 얻어먹기는 했다).
식당에서 어떠한 이유로든 만족스럽지 못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 화가 나는 기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닌 먹는 행위, 그러니까 가장 기본적인 삶의 요구조건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식도락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져 엥겔계수가 높아지면 그러한 경향도 한층 더 심해지는 이유는, 식도락의 추구를 위해 쓰는 돈의 비중이 높아질 수록 기회비용에 대한 고민도 정비례해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 십 년 전에 성탄 기분을 내겠다고 썼던 돈은 이만 오천원 남짓, 지금의 물가와 한층 더 높아진 사람들의 수준을 고려해본다면 기분 나빠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액수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맛있는 음식도 많고 좋은 식당도 많으니 봉사료다 세금이다 붙으면 대개 십 만원 정도는 예산으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정도 금액의 돈이라면, 사람들은 그 돈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고등학교 정치경제 시간에 배웠던 기회비용이라는 개념을 써도 될 것이다. 여자들이라면 구두 한 켤레는 아니더라도 작년부터 입어왔던 펜슬 스커트에 어울릴만한 블라우스 한 벌이나 고만고만한 귀걸이 한 쌍 정도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그러한 종류의 즐거움으로 먹는 즐거움을 대체하지 않는 이유는, 그 두 종류의 즐거움이 100% 호환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바꿔 말하자면, 사람들이 그 정도의 돈을 기꺼이 들어가며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는 이유는 음식으로 대표되는, 삶에서 기억될만한 시간을 사고 싶기 때문이다. 좋은 음악이 공기를 수놓은 아름다운 인테리어에 안락한 의자와 식탁, 극진한 서비스, 그리고 그런 공간적, 시간적, 그리고 감정적 바탕 위에 얹히는 훌륭한 음식, 결국 음식은 살면서 아주 종종 벌어지지 않는 순간을 이끌어내는 매개체이며, 그 순간의 절정이 물화하는 개체인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식도락에 알면서도 또 모르면서 여러 겹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아주 작은 결함이라도 거기에 끼어드는 것에 대해 극도로 불안해한다. 아까도 언급한 것처럼, 기회비용의 측면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한층 다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비싼 식당에서 나오는 수프에 습관적으로 뿌리는 후추만큼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완벽이다. 작은 티끌하나도 떨어지지 않는,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 탁자와도 같은 완벽의 상태. 긴장을 팽팽하게 머금은 기대의 유리는 작은 실망의 깃털만 내려앉아도 산산히 깨져버릴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정말 어려운 임무에 도전하는 셈이다. 사람들의 기대는 크고, 실패는 용납되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까.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안다고 생각한다. 일단 사람들이 마음을 편하게 막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면 되는 것 아닐까?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은 두렵고 그들이 식당을 시험하는 것은 결국 기회비용의 측면에서 깊은 고민을 하다가 이쪽을 선택한 자신을 시험하는 셈이니까. 그러므로 그들을 일단 편안하게 대접해서, 그들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 여건을 조상해주면 된다. 그럼 사람들은 긴장이 풀리고 너그러워지기 시작하고, 그 뒤로부터의 시간은 조금씩 쉽게 지나가지 않을까, 혹시라도 조금씩 마음에 들지 않는 점들을 느끼게 되더라도? 결국 사람들이 찾았던 것은 음식이 이끄는 좋은 순간이며 시간, 그리고 기억이고, 식당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음식이 이끄는 서비스. 즉 사람을 즐겁게 해주겠다는 마음이니까. 그 수요와 공급은 바로 거기, 마음이라는 지점에서 만나니까.
*사진은 작년 5월 뉴욕 여행에서 먹었던 WD-50의 Sous Vide에 천천히 익힌 삼겹살. 사실은 디저트가 더 관심 있어서 큰 마음 먹고 간 식당이었는데, 음식도 음식이지만 바텐더나 리셉셔니스트를 포함한 손님 접대와 서비스가 정말 굉장히 프로라는 느낌이 강했다. 이 사진의 출처는 내 다른 블로그. 사실 포도주 한 잔 포함해서 본식과 세 가지 코스의 디저트를 포함해 우리나라에서 요즘 엄청나게 인기라는 그 비싼 식당들 만큼의 돈을 썼다. 그러나 당연히 돈 아깝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나마 우리나라에서는 저런 식의 서비스 불편을 토로하는 게 어느 정도 먹힌다. 몇 년 전 서부 일주를 할 때, 호텔의 추천을 받아서 샌프란시스코 번화가의 어느 스테이크집에 갔었는데, ‘몰타의 매’ 였나 하는 소설의 배경인가가 그 작가의 단골집인가였다는 그 오래된 집은, 그야말로 완전히 tourist’s trap이었고 스테이크는 미국에서의 아웃백 수준이었다. 화가 나서 나는 나중에 같은 방법으로 식당으로 편지를 보내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야말로 씹혔다. 알고 보니 그 식당은 원래 그 따위의 집이었더라.
# by bluexmas | 2009/08/20 16:30 | Taste | 트랙백 | 덧글(16)
그래도 큰 업체같으면 남들 눈 생각해서 들은척이라도 하는데, 작은 가게는 싫으면 중이 떠나란 식이곤 하죠.
그러나 사실, 그렇잖아요. 돈 내고 먹으면 잘 대접 받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지요. 지금은 마음이 좀 나아지셨기를^^ 동기를 부여해주셔서 제가 고심끝에 이런 글마저 쓰게 됐는데…
(서울에서 오산까지 오는 지하철 내내 쓰게 되더라니까요-_-;;;_
블마스님이랑은 뭔가 마인드가 비슷한것 같아서 댓글은 다 못 달아도 자주 엿보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혼자 해먹는 음식이 제일이지요.
대접할 사람이 없어서 혼자도 잘 안해먹게 되지만 =_=
음식장사를 참 가볍게 하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아요.
맛이나 서비스면에서 외식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줘야 되는데 말이에요.
요새 음식점들 대부분이 서비스와 질 적인 면에서 너무 수준이하가 많은 건 사실인 듯 합니다.
장사하려면 간쓸개 집에다 내어놓고 와서 해야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수준이하가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공개 덧글입니다.
일단 도시 인구가 너무 많으면, 어차피 사람들이 배채우러 오기에 허술한 가게는 늘어납니다.(도쿄도 그렇죠) 그리고 우리는 상업외식문화의 역사가 짧은 편이라, 한식이 아닌 외국식음식의 경우, 어차피 고객도 경험치가 적어 허술한 면을 그냥 넘어갈 때도 많겠죠~
(오늘도 강남역의 터키식당이란 데서 불닭덮밥같은 묘한 음식을 먹고 후회한 1人;;)
그래도 사시는 곳에는 좋은 재료로 좋은 음식 만드는 식당이 많지 않나요? 가보고 싶은 곳이 꽤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