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향

정오를 조금 넘겨 지하철을 타려 역 계단을 오르다가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멈춰 분향을 했다. 때마침 전철을 탈 때까지 몇 분의 여유도 있었다.

지난 번 노 전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나는 끝끝내 분향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깟 분량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안 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그 반대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하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흽쓸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은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고, 그 미안한 마음으로 이번에 망설이지 않고 분향을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의 분향도 역시 김 전대통령의 정치적인 업적을 내가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그런 능력으로 평가해보니 그가, 그리고 그의 업적이 나의 분향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언제나 거듭해서 강조하건데, 나는 정치에는 완전히 무지한 사람이다. 이 나이 먹도록 어느 정치인 개인이나 그 개인이 이끄는 정치 집단이 내세우는 정책보다는 가장 상식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개인과 그런 개인들의 목소리가 하나하나 죽지 않는채로 모여 이루는 집단이 그 상식에 맞춰 사는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는 멍청하도록 순진한, 이상세계관에 기댄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하여 길에 담배꽁초 안 버리고 신호등 잘 지키며, 만약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정말 열심히 고민해서 치열하게 글 쓰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 세상이 아주 조그만 구석부터 조금씩 더 나은 곳이 될 거라는 헛된 믿음.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정치 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언감생심… 그저 나는 나의 마음에 기대었다. 운동을 하다가 체육관 텔레비전에서 그의 서거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노 전대통령의 영결식에서 김양숙 여사와 손을 잡고 서럽게 우는 그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때,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가 오래 살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나는 그를, 그냥 아주 막연하게 믿었다. 사람을 향한 가장 기본적이고 맹목적인 종류의 믿음이었을 것이다. 그건 물론, 그를 악 따위는 저지르지 않는 절대선 으로 여기는 종류의, 신격화를 닮은 믿음은 아니었다. 그냥 사람에 대한 사람의 믿음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드는 세상에서 비록 내 나라의 지도자였지만 얼굴 한 전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내 가족에게나 줄 수 있는 믿음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모든 정치적 업적이며 죽은 사람을 숭상하는 미사여구는 그야말로 그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지막 행보인 죽음 앞에서 무의미하다. 나는 그를 믿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이 더운 날씨에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이 평안하기를 내 마음 다해 기원한다.

 by bluexmas | 2009/08/19 23:24 | Life | 트랙백 | 덧글(5)

 Commented by 펠로우 at 2009/08/20 00:42 

분향,추모는 정치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마음의 표현이죠.

방송도 그렇고 정치도 그런게, 이미지를 먹고 삽니다. 그들의 실체는 어떤 의미에선 중요하지 않아요. (여담이지만, 아는 방송인은 음주운전하다가 택시기사에게 걸려서 수백만원을 뜯기기도 했죠;; 이미지가 망가지면 끝장이니까요)

착한 이도 정치를 한다면 비열한 행위를 해야하고, 나쁜 이도 정치를 한다면 웃으며 어제의 적과 손 잡습니다. 사실 당파가 다르다고 다투는 정치인들 모두 실체와 스타일은 흡사할 때가 많죠.

추모를 덧붙이며, 정치를 정치적으로 했던 사람으로 기억해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20 16:46

물론 이미지가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이미지가 좋은 쪽으로 일치하기도 하겠죠. 펠로우님이 말씀하시는 ‘정치를 정치적으로 했던 사람’ 은 좋은 의미겠지요?

 Commented by 펠로우 at 2009/08/20 23:01

그렇죠 뭐^^ 정치가는 정치적인게 그에 어울리는 거죠~

 Commented at 2009/08/20 01:2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20 16:47

저도 거기 지나갔는데, 그냥 지나치고 들어가보지는 않았어요. 그 앞의 광장이 정말 휑덩그렁하게 넓잖아요. 거기에서 시간 보내다가 오페라 하우스 생각이 갑자기 나서 막 뛰어갔던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