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수 직전의 방백

1,100.

당신에게는 미안. 당신이 싫어진 것도 아니고 당신 때문은 더더욱 아닌데. 또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 사랑이 당신을 만나기도 훨씬 전부터 말라 죽어 가고 있었던 이 삶에 대한 의지를 더 생생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더라구. 그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내가 미안. 나도 노력했지만, 버겁더라. 너무 무력하게 생각하지는 마. 어차피 그런 종류의 일에는 무력하도록 만들어진 게 우리 별 보잘것 없는 인간이라고, 나는 주제넘게 생각해왔거든. 누군가의 삶을 발판으로 삼아 내 삶에서 허락되지 않은 자리로 올라서는 건, 아무래도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닌듯 싶어.

이렇게 대기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서 매일 어둠이 우리에게 와서 쌓이는 걸 마주 대하고 살다보니 지겨워져서, 이제는 내가 어둠을 찾아 내려가고 싶어졌어. 가라앉다 보면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지겠지? 나는 어느 정도의 어둠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숨을 쉬고 있을까? 조금은 오래 버틸 수 있으면 좋겠어. 적어도 눈을 뜨고 있어도 더 이상은 빛을 느낄 수 없는 그 깊이까지 만큼은, 그래서 아, 이제는 더 이상 눈을 뜨나 감으나 차이가 없구나 생각하며 마지막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그리고는 어둠의 바닥으로 스르륵, 가라앉는거야. 대기로 둘러싸인 우리의 세상에서 나처럼 눈을 뜨고 숨을 쉬기가 버거워 그렇게 쌓였던 어둠이 떠나는 걸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언제나 그렇게 어둠이 짙고 또 짙게 깔려 있는 바닥으로 스르륵, 가라앉는 거야.

내가 이 대기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가벼운 사람이었다고 해서 가라앉지 않을까 걱정은 하지 마. 지금까지 뜬 눈으로 낮을 지새우면서, 또 밤을 기다리면서 세상을 상대로 쌓아온 증오가 어깨에 한 짐이거든. 후회할 겨를도 없이 깊이 가라앉을 수 있을거야, 나. 그래도 그렇게 짐처럼 쌓아온 더러운 감정들이 이럴 때에는 쓸모가 있는 거구나,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가라앉는 것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만약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 나를 위해서 1년 동안만이라도 바다에서 온 것들은 먹지 말아줘. 이걸 쓸 때만 해도 한 3년 정도 불러 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래봐야 난 확인할 수도 없고, 어두운 바닥에 가라앉은 존재 따위 3년이나 기억해주는 게 대기로 둘러 싸인 세상의 인정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다만, 마치 나라는 사람 따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잊고 살게 될 어느 날 저녁에 친구들이랑 동네 중국집에서 함께 먹게 될 냉채의 해파리에서 나의 체액을 어렴풋이 맛보게되더라도 너무 놀란 표정은 짓지 마, 친구들 앞에서. 그냥 꿀꺽 삼키고 고량주로 넘겨버려, 그럼 괜찮을거야. 바로 그런 순간에 입 안의 모든 맛을 지워버리라고 술이 있는 거잖아. 때로는 입안의 맛 뿐 아니라 감정이나, 아예 삶의 맛마저 지워버리도록 쓰디 쓴 맛도 가끔은 필요하니까. 그런 자리에서 국산 술은 피하도록 해. 걔들은 음식이고 뭐고 모든 맛을 다 덮어버릴 정도로 달아서, 당신이 술을 마실 그 이유에 발맞춰주지 못할테니.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앞으로 나를 잊고 더 기나긴 시간을 뜬 눈으로 낮을 지새우며 살아야 할 당신을 위한 도움말이야. 응, 당신이 내가 이렇게 사라진다고 해서 똑같은 길을 걸어 당신의 삶을 단축시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당신이 가진 삶의 의지는 가끔 너무 뜨거워 내가 가까이 가기조차 힘들 정도로 치열했다고 기억하니까. 그리고 물론, 기나긴 시간이 흘러 당신 삶의 끝에 이르렀을 때, 당신은 나의 그것보다 훨씬 더 길었던 삶을 반추하느라 나의 존재 따위는 기억하지 못하게 될거라도 지금도 잘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거나 미안해하지도 말고.

그럼. 당신을 알게 되어서 즐거웠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그래봐야 더 오랫동안 괴로워 할테니.

* 그림: m

 by bluexmas | 2009/08/14 01:34 |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by delicious feelings at 2009/08/14 10:09 

흠…먼일있으신지….ㅡㅡ^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15 01:33

아닌데요^^

 Commented at 2009/08/18 00:0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18 01:01

그렇죠? 그림 제가 그린게 아니라는 건 아실테고…^^

그림 좋아요. 다음에는 좀 밀도가 낮은 글을 쓰려고 해요. 사실 어떨 때에는 이 협력이 좀 어려울때가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