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더라, 오늘

오늘이 말복이었구나. 누군가와 메일을 주고 받다가 얘기를 들어서 알게 되었다. 텔레비젼을 안 보니 알 수가 있나. 온갖 보양식 입에 우겨넣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는 프로그램들이 넘쳐났겠지. 그렇게 과식하고 살면서 복이라고 또 보양식을 찾으면 나이에 맞춰 바지 허리가 늘어날텐데, 우리는 참 무지하도록 용감하다. 아니, 무지해야 용감해지는 건가.

어쨌든, 오늘 날씨는 정말 말복답게 무지하게 덥더라. 백수다 보니 격식을 차릴 일이 없어서 이 여름 내내 운동화에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녔는데, 공교롭게도 격식을 차려야 하는 날이면 무지하게 덥거나, 비가 엄청나게 많이 오거나, 아니면 그 둘을 합친 날씨였다. 얼마나 덥게 느꼈냐하면, 강남역에서 청담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냉방을 시원하게 틀어주던 고속버스에서 내려서 강남역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그 십 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땀을 비오듯 흘리다가 이성을 잃고 전혀 엉뚱한 버스를 잡아탈 정도였다. 결국 신사역 사거리에서 내려서 어차피 강남역에서 기다렸어야 하는 시간만큼 애초에 타야했을 버스를 다시 기다렸다. 생각해보니까,  길 한 가운데에 만들어놓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게 단지 교통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의 건강 측면에서도 길 바깥쪽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더 나쁜 것 같다. 결국 매연이며 뜨거운 열이며, 양쪽 차선 모두에서 오는 것들에 노출되는 셈이니까. 이런 걸 그때 기획 및 계획했던 사람들이 염두에 두었을까? 잘 모르겠다. 아마도 차나 사람의 흐름에 대해서만 생각했겠지.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위한 계획이 아니었던 듯… 그렇게 바꿔서 정말 차가 쑥쑥 잘 빠지는지도 나는 잘 모르겠고.

요즘은 머리도 좀 길고 해서 땀에 젖으면 좀 흉물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웬만하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는 약속이 있으면 아예 좀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나와 근처 어딘가에서 땀을 좀 식힌 다음에 사람을 만난다. 탐앤탐스에 처음 가 봤는데, 밖에서만 보았을 때에는 그저 스#벅스 짝퉁인줄로만 알았더니 이건 어째 뭔가 좀 다른 차원이더라. 프렛첼이나 피자 따위도 파는 줄은 몰랐다. 그러다 보니 어째 정겨운 느낌이 들어서, 볶음밥이나 오무라이스까지 팔아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제일 싼 커피를 시키고 남는 30분 정도의 시간 동안 땀을 식히려고 했는데, 세상에 천원짜리 먹는 샘물-세수하는 샘물도 파는거냐, 언제나 이’ 먹는 샘물’ 이라는 명칭은 뭔가가 좀 웃기다고 생각한다. 만약 세수하는 샘물도 판다면,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간 샘물의 물은 세수하는 샘물로 팔아야 되는지, 아니면 먹는 샘물로 팔아야 하는지 좀 헛갈린다. 원래는 세수하는 샘물이었는데 그날만 세수하기 싫어서 먹고 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세수하면서 먹기도 했을 것 같고…-을 팔아서 그걸 샀더니 행사기간이라고 한 병을 또 준다고… 그래서 그걸 또 가방에 넣고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좀 무겁더라.

날씨도 그렇게 더운데 잘 안 입던 긴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려니 곧 정신이 혼미해져서 걸어다닌다기 보다는 더운 기류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늘 서울에 오면 노새타고 온 시골영감의 마음자세가 생겨서, 꾸역꾸역 돌아다니면서 볼일을 그럭저럭 보고 오산에 내려와서는 이마트에마저 들러 우유를 비롯한 무거운 것들만 잔뜩 사가지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대체 오늘 내가 뭘 하고 돌아다녔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사진은, 압구정동에서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생각난, 이름도 그냥 ‘만두집’ 인 만두집의 만두국. 사진이 구려서 음식밸리용 글은 안 쓰기로 했다. 그래도 이거나마 생각이 나서 다행이었다. 백화점 지하에서 뭔가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으니까. 이 만두는 정말 십 년 만에 먹어보는 건데, 처음 먹었을 때 아니 뭐 이런 만두가 다 있어…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동네에서만 수십년 산, 아마도 그 집을 추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친구에게 불만을 토로했더니 대뜸 만두 맛을 몰라서 그런 거라고, 그 집 만두가 원래 두부 많이 넣고 푸근하게 만드는, 다른 집 만두와 다른 만두라서 그 맛을 모르는 거라는 핀잔을 돌려받았다. 아직도 그 기억이 선해서 언제 꼭 한 번 다시 먹어봐야지, 생각했던 만두였는데 과연, 오늘 먹으니까 조금 느낌이 다르기는 하더라.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만두 여섯 개를 넣고 끓인, 별 다른 건더기며 고명도 없는 만두국이 팔천원이라는 건 압구정동이니까 가능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나 김치국물을 넣은 듯한 국물은 칼칼한게 조금 뭉툭한 만두맛이랑 조화를 잘 이루기는 했지만, 풍미가 너무 없고 까칠했다. 보통 만두국이라면 만두피에서 나온 녹말이나 만두속에서 나온 고기 기름이 섞여 그 맛도 풍부해지기 마련인데, 이 국물은 어떻게 그런 느낌이 전혀 없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맛은 괜찮았지만, 결국 이런 집도 위치나 전통으로 인해 내놓는 음식 자체와는 조금 별개로 컬트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보양식을 먹었을테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만두 여섯 개로 저녁을 때웠다. 올 여름 나기가 힘들지만 딱히 보양은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참, 만두 얘기를 한 친구 얘기를 곁달이로 좀 하자면, 옛날 싸이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친구 폴더를 만들어 자기 친구나 일촌 사진을 올려놓고 나름 끄적끄적 그 사람의 평을 몇 줄 달아놓곤 했는데 얘도 그걸 만들어서 내 사진을 퍼가서는 ‘시니컬한 친구’ 라고 써 놓았었다. 살면서 참 시니컬하다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별로 느낌도 없는데(최근에 들었던 시니컬한, 아니 냉소적인 사람이라는 얘기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 분명한 건 그게 칭찬은 아니었을 거라고. 뭐 나도 내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다는 건 잘 아는데, 그래도 단 한 가지 내가 냉소적이지 않은 대상은 바로 만두다. 나는 만두를 사랑한다. 아마 하루 세 끼 일주일이라도 만두를 먹을 수 있을 듯. 사실은 어제 점심도 무교동의 그 사람 머리통만한 찐빵 만들어 파는 집에서 만두로 때웠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콩고기가 든 냉동만두는 먹지 않는다. 그리고 기억하기로 최고의 만두집은 강남역의 ‘엄마 만두’ 라고, 만두도 만두지만 북어구이백반하고 반찬으로 나오는 깻잎간장절임이 정말 맛있는 집이 있었는데,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없어졌고 지금은 Tea Purple 이라는, 말도 안 되는 스#벅스 짝퉁 커피집이 들어앉아 있다. 엄마는 어디로 가신 걸까, 훌쩍T_T 우리 어머니가 있으니까 만두 만드는 엄마는 딱히 그립지 않은데, 엄마가 만드는 만두는 정말 그립다.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이승환이나 전람회 등등을 좋아했는데, 보면 내 삶이 이승환이나 전람회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정확하게 궤를 같이 할 수 없는 것 같다, 더 이상은. 물론 다른 사람의 취향은 존중한다, 그러나 연락을 하지 않고 산지는 아주 오래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다. 유행가의 가사가 말하는 사랑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너무 비뚤어진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그렇게 이승환이나 전람회를 좋아하는 친구가 나를 냉소적인 인간이라고 얘기했던 이유일 것이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역시나 정말 냉소적인 인간이었다고, 십 년 전에 내가 제대로 보았다고 얘기할 것이다, 하하하^^

 by bluexmas | 2009/08/14 00:44 | Life | 트랙백 | 덧글(12)

 Commented at 2009/08/14 00:5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14 01:06

기억하시는군요! 왠지 이산가족 만난 것처럼 반가워요^^(저희 외할머니는 정말 이산가족이셨죠T_T)

아무래도 만둣속은 기름이 없는 부위를 쓰는 게, 이론적으로는 좋을거에요. 왜냐면 너무 기름기가 많을 경우, 만두를 끓이거나 익혔을 때에 기름 때문에 만두가 터지거나 국물이 너무 느끼해지거나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삼겹살이나 목살보다는 장조림거리 같은게 좋다고는 생각하구요. 거기에 촉촉함을 더해주기 위해서 두부나 기타 재료를 넣는게 아닐까 싶어요. 저도 예전에 만두를 만들었을 때에 두부 물기를 너무 짜서 완전히 퍽퍽한 만두를 만들었으니 다음에는 물기를 좀 덜 빼고 넣어보려구요. 그러나 그 배합비를 맞추기는 쉽지 않더라구요. 아무래도 속 자체만으로는 두부를 넣고 좀 질척한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다 이론이고, 저도 다음에는 책을 보고 무게를 달아서 만들어보려구요.

만두피는, 예전에 파스타 롤러로 펴서 만들어봤는데 너무 힘들더라구요. 결과도 영 시원치 않았구요.

 Commented by 펠로우 at 2009/08/14 01:39 

그 중앙정차대는 확실히 교통효율만 위해 만든거지, 사람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죠..명박이형 작품, 굳이 따지면 유용하긴 합니다. 그거 하기 전에는 강남대로를 대중교통으로 20분이내에 빠져나가기 불가능할 정도로 막혔죠.

두부가 들어간 슴슴한 이북식만두라면..그 동네를 포함해 서울에선 안세병원 뒷골목 [평양면옥]만두가 괜찮습니다. 만두 속이 균형잡혔죠. 여기도 뭐 8천원은 하지만;; 돈아깝진 않더군요. 다만 거기 물냉면은 맛이 왔다갔다 하는게 흠이더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15 01:23

뭐 형님이 하시는 일이 그렇죠. 저는 아주 옛날부터 기대가 없는 사람이어서요. 사람 생각할 수 없게 생긴 분이신 것 같아요. 외모나 생각이나…

말씀하신 그 쪽 동네도 종종 돌아다니는데, 말씀해주신 집도 가서 만두 먹어봐야겠네요. 저는 솔직히 돈 아깝지 않게 먹을만한데가 없으면 바나나 정도나 주워먹고 안 먹는 사람이라서요-_-;;;

 Commented at 2009/08/14 04:4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15 01:26

아니 그게 뭘 죄송하다구 말씀을…T_T 아무 얘기나 해 주셔도 저는 즐거워요^^

미국은 곧 무화과가 나올텐데 무화과와 브리치즈 조합 꼭 해 보세요. 빵은 치아바타가 좋을 것 같네요. 치즈는 뭐 홀푸드 같은데서 브리치즈 잘라 파는 거 하나 사시면 될 거구요. 혹시 브리보다 더 풍부한 맛을 원하신다면 St. Andre 같은 것도 있는데 그건 너무 짜고 거의 버터와 다름 없어서…

아마 가을정도면 10불 안짝의 샤도네이 정도만 곁들여도 좋겠네요~^^

 Commented at 2009/08/14 08:2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15 01:28

히히 맞아요 저 우울하고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인간이에요 T_T 그런 얘기는 오프에서 하도 많이 들어서 저도 아무 생각이 없어요T_T 저만 아니면 그만이니까 T_T;;;;

사실 뭐, 이 정도 나이 먹고 누가 본인한테 뭐라고 얘기하는 데에 너무 휘둘리면 줏대를 가지고 살기가어려워지죠. 물론 건설적인 비판에는 귀를 열어놓아야 하지만요^^

 Commented by deathe at 2009/08/14 15:34 

나쁘게 말해서 가격대비 맛없는 만두이지만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해주는 것을 보면 오히려 시니컬하지 않은 사람인것만 같아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15 01:31

음, 그렇게 생각은 안 해봤는데 정말 가격대비로는 맛 없는 만두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뭐 ‘맛은 이만하면 괜찮지만 팔천원은 아닌데’ 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게 그거인 셈이네요-_-;;;

어쨌거나 저는 시니컬한 인간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요 T_T

 Commented by liesu at 2009/08/14 20:11 

탐앤탐스에서 피자도 파는지 몰랐네요. 충무로 탐앤탐스 종종가서 프레첼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15 01:33

어쩌면 제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요. 모형만 봐선 그게 뭐 피자지 뭔지 몰라서…

프렛첼도 잘 만든 걸 먹어야지 쇼핑몰 같은데에서 대강 파는 걸 먹으면 좀 그렇더라구요. 완전히 밀가루 덩어리인데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