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집이 좋은 이유
며칠 동안 너무 더웠던터라, 차라리 비가 반갑다. 비가 오면 밖에 나가기 싫어지는데, 그 정신적인 전통은 많은 다른 남자들처럼 군대에서 비롯되었다.
4월 중순, 지자제 선거 다음 날이었던 금요일에 입대해서는 자대인 양평으로 향했던 시기가 거의 장마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람을 대책없이 꾸역꾸역 받았던 내 자대에서는 인력과잉 사태가 벌어졌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건축과로 전과했던 나는, 짤없이 공병대로 갈 것이 두려워 그 전해에 신체검사를 받을 때 전공이었던 화학공학과를 계속해서 다니다나 입대했다고 거짓말-이라봐야 그저 전공이 바뀌었다고 말하지 않은 것 뿐이었지만-을 했고, 덕분이었는지 유류관리라는 특기를 받아 보급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력과잉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던 자대에서 유류관리병의 자리는 한참 전에 찼던터라, 나와 같이 부대로 향했던 애들 몇 명은 보직도 없이 매일 대기만을 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병력을 놀게 놓아두는 것은 그 집단을 밥 먹이려 쓰는 세금을 생각해 보았을 때 죄악보다 더 한 죄악이니, 나와 아이들은 비가 미친 듯이 내리기 시작하자 밖에 나가 우의를 걸치고 삽으로 배수로를 정비했다. 비는 하루 종일 왔고, 배수로도 하루 종일 정비해야만 했다. 그러기를 일주일 정도 했나? 마침내 나와 잉여병력 아이들은 그저 미미한 보직을 받았지만 아마 또 며칠은 그렇게 삽을 들고 배수로를 정비했을 것이다.
그렇게 정말 말 그대로 비오는 날 삽질을 하고 난 뒤로 부터는, 비 오는 날이면 아예 밖에 나가 비에 몸을 적시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웬만하면 집에 머무르는 걸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은 도서관에 잠깐 갈 일이 있어서 비를 맞으면서 가야되나 망설이고 있었는데, 밖을 보니 비가 잠시 그친 것 같다. 이런 날이면 지하터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다시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싫다 T_T
# by bluexmas | 2009/08/11 16:53 | Life | 트랙백 | 덧글(9)
젊은이들에겐 참 소중한 시기인데 유용하게 쓰지 않고 그야말로 삽질을 시킨다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