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

누구더라? 잘 들여다보지도 않는 페이스북에 누군가 친구 신청을 했단다. 누구지? 누구지? 모니터 앞에 멍하니 앉아 잠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재작년인가 미친척하고 옷을 샀다가 또 더 미친척하고 밥이나 한 번 같이 먹자고 얘기했던 옷가게의 점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재작년 말, 말도 안 되고 건물은 더더욱 안 되는 이상한 프로젝트의 바람몰이 프리젠테이션을 위해 무려 주말에도 나와서 일하던 그때,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랬는지 평소라면 비싸서 잘 들어가지도 않던 옷가게에 들어가서 덜컥 겨울 코트를 사버렸다. 마침 일하던 여자점원이 우리나라에서도 살았다는 한국계 미국인이길래 이러저러하니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자고 그랬는데, 처음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으나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기보다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지, 연락을 하겠다고 말하고는 안하더라. 내가 밥을 먹자는 얘기를 대체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먼저 먹자고 얘기를 꺼낸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유가 어찌 되었든 싫으면 싫다고 듣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던지라 당연히 거절로 인식해야만 하는 침묵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다. 아니 정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서 얘기한 것도 아니고. 나이가 몇 살인지는 더더욱 신경도 쓰지 않았고(나도 남자라고 마냥 어린 상대방이 좋다고 마음대로 생각하는 건 좀 섭섭하다…).

그런데 웃기는 건, 고객관리는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할인철이 다가오면 꼭 이메일은 보내더라. ‘개인세일하니까 한 번 들러봐~’ 뭐 이런 식으로. 그래서 거기에다가 대고 장난 삼아 ‘아니 대체 밥 먹자고 그런데에는 왜 대답을 안 하는거냐’ 라고 한 번 비아냥거려봤으나 또 묵묵무답. 그리고 또 할인철이면 날아드는 이메일… 그러나 한 번 충동구매면 됐지, 계속 가서 살만한 옷도 없고 물론 돈도 없었으니 나도 가서 한 번 둘러보는 정도로만 체면치레를 하다가 결국 이렇게 돌아온 것인데, 떡허니 친구 신청을 한 걸 보니 좀 웃겼다. 그래봐야 옷도 없고 돈도 없고, 또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할인행사 안내 메일을 받아도 얼굴도 비출 수  없구만.

어쨌든, 거절할까 말까 하다가 수락을 해놓고 홈페이지를 가보니 내가 무려 698번째 친구더라. 698… 이게 그냥 숫자로 쓰면 아무런 느낌이 없는데, 시원치 않은 수준의 시각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만큼의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는 공간을 생각하면 부담스러워진다. 달리 말하자면 아무 생각 없이 옆구리에 끼고 있을 만한 숫자가 아니라고나 할까?  698개의 가방도, 698켤레의 신발도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하물며 698명의 사람을 친구로, 아무리 온라인이라고 해도, 거느리고 있는 느낌은 대체 어떨까나. 내 이 초라한 블로그를 링크한 사람도 698명의 채 1/3이 안 되는데도 어쩌다가 그 모든 사람들이 내가 새 글을 올리자마자 거의 동시에 마우스를 클릭해서  여기에 들어오는 장면을 떠올리면 손발이 오그라드는데… 어쨌든 왕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왕래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 며칠쯤 지나서 슬그머니 끊어버릴 생각이다(여기까지 얘기하면 ‘아니, 그럼 애초에 왜 친구 수락은 한거냐’ 라고 궁금하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건 뭐…). 다니던 회사의 누군가도 회사에 다닐 때부터 친구 신청을 하는데, 별로 왕래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어서 일단 수락한지 슬그머니 지나서 끊어 놓았더니 또 신청하고, 거절했더니 최근에 또 신청을 하더라. 한 사람한테 한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나쁜 사람이 되면 나도 기분이 나빠진다. 그렇지만 어차피 어떻게든 다시 보게될 사람도 아니잖아. 같이 회사에서 정리당했다고 동병상련이라도 느끼는 걸까…?

에, 어쨌든 두서가 없는 얘긴데. 억지로 훈계라도 하는 기성세대의 마음가짐을 빌려 결론을 내려보자면 ‘의미없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건 별로 내키는 일이 아니다’ 정도가 될라나? 698명의 홈페이지에 30초씩만 시간을 써도 거의 14,000초, 거의 네 시간 정돈데 그럴 시간이 대체 있기는 한건가… 누군가의 인간관계에 주변인으로 머무르는 건 어째 달가운 일도 아니다.

 by bluexmas | 2009/08/05 17:18 | Life | 트랙백 | 덧글(11)

 Commented by 잠자는코알라 at 2009/08/05 20:04 

698명~ 생각만해도 어질어질하네요

클릭 한번으로 친구를 만드는게 익숙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저도 때로는 원치않는 피드백?을 감당해야 하는데요 가끔 참 부담이 되네요 ;ㅁ;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06 00:29

어지럽죠@_@ 아예 700번째면 더 멋졌을수도T_T

클릭 한 번으로 친구 만들면 그 친구가 친구가 아닌 것 같아서 좀 두렵죠. 원치않는 피드백 감당하기도힘들구요. 마음 없을때 덧글 쓰기도 괴롭잖아요.

 Commented by xmaskid at 2009/08/05 21:05 

Facebook이라는게 사실 친구라기보다 아는 사람 넣는 경우가 많아서 젊은 사람들의 경우는 수백명 넘는게 금방이더군요. 과연 그 많은 지인을 관리할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06 00:30

네 뭐 천 명 넘어가는 사람도 많이 봤어요. 어찌 보면 인기의 척도라고도 할 수 있으니 뭐 그런가보다 하지만 정말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ㅎㅎㅎ 나 ㅋㅋㅋ만 써도 한 서너시간 걸리지 않을까요?

 Commented by basic at 2009/08/06 01:44 

저도 처음에는 친한 친구들만 추가했는데 그게 미묘한 것이. 별로 안 친한 애들(정확히 말하자면 말 한 마디 안 나눠봤으나 얼굴만 아는?)도 request를 해 오면 거절하기가 뭣해서 얼렁뚱땅 숫자만 불려지고 있어요. 근데 천 명은 좀…심하네요. 연예인인가봐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10 00:16

그런 것도 있죠. 그러나 아닌 건 아니라서 거절도 막 해요 요즘은… 그래봐야 어차피 활동을 안 하는지라;;

 Commented by 킬링타이머 at 2009/08/06 07:02 

저는 인간관계가 재산이다, 언젠가는 도움이 된다 이 개념에 반감을 갖고 있어서요.

박경림이 인맥관리 책 냈다는것도 좀 웃기고….

사람 자체가 호감같지가 않은데 관계를 너무 이용하는것 같아서…서로 이용하는 거겠지만;

저는 어설픈 관계가 이어져있다는거에 되게 부담을 느껴서, 초창기엔 싸이도 안했었고 동창이 일촌으로 엮여있는걸 견디질 못하다가 그냥 끊어버렸어요. 되게 상처받았을텐데 ㅎㅎㅎ 왜 그렇게 까칠했는지…지금은 많이 나아진것 같네요.

698녀는 정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네요.

저같은 극히 일부나 부담스러워 하지, 많은 사람들은 그 숫자를 자랑스러워 하니깐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10 00:17

연예인 빼면 쓰러지는 나라에서 연예인이 뭐들 안 하겠어요. 곧 연예인 똥도 지마켓에서 팔듯… 말려서 팔면 냄새 안 날지도 모르죠;;;;

이용하려고 사람을 만나면 나도 구려지는가 싶어 밥이 안 먹힐때가 있죠.

698녀는 세일하면 또 연락할텐데 이젠 제가 갈 수가 없어서 참 안타깝네요.

 Commented by 닥슈나이더 at 2009/08/06 08:20 

전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1명이라…ㅠㅠ;;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8/10 00:18

아니 우리 대인배이신 닥슈님께서 친구가 한 명이라니 그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T_T

 Commented by 닥슈나이더 at 2009/08/10 08:10

진정한 친구라는 뜻의 친구죠… 베스트 프랜드보다더 더 가까운 친구 정도 되는 정의에 해당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