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으로 접은 삶
고백하건데,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을 채 열 명도 들어차지 않은 토요일 아침 극장에서 보면서, 나는 두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정확하게 무슨 장면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는지는 지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은 단지 그 영화뿐 아니라, 그 시간 언저리의 삶 전체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은.
그렇게 눈물을 흘렸지만, 솔직히 영화 자체에는 그렇게 공감하지 않았다. Forrest Gump 처럼 그저 사람의 눈물이나 쥐어짜게 만드는 그렇고 그런 상업적 배설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요즘 부쩍 생각하기를 정말 삶을 반으로 접어서 젊음과 성숙이 정확하게 꼭대기에서 만나는 지점 이후로 사람의 삶은 정확하게 반으로 접은 것처럼 처음 시작했던 그 상태로 쇠퇴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그 영화, 혹은 그 영화가 바탕이 된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사람의 퇴화는 결국 그러한 사람, 혹은 모든 생명이 붙어 있는 것들이 숙명, 혹은 원죄처럼 가질 수 밖에 없는 삶 자체의 쇠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지금보다 한 스무 살쯤 어렸을 때에는, 지금 나만큼 나이를 먹고 나면 그때처럼 나에게 어린 자아가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이만큼 나이를 먹고 나니 삶이라는 건 정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와 그 나의,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그 어린 자아가 벌이는 하나의 싸움과도 같다. 어린 자아는 계속해서 나를 뚫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려 하고, 나는 지금 내 나이와 삶의 성숙된 정도를 생각해 볼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끝없이 그 어린 자아를 억누르려고 하고… 사람의 입과 목구멍을 뚫고 낳은 알이 다 자라고 나면 에일리언의 새끼는 사람의 가슴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고, 누군가는 그게 두려워서 결국 용광로 속으로 몸을 던져버린다. 그러나 나는 하나 밖에 없는 내 삶이 아깝다는 생각에 차마 내 몸을 용광로 속으로 던져버리지 못하고 그저 내 가슴을 계속해서 짓누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나와 나의 어린 자아와의 관계… 그러나 뛰어들어도 괜찮아, 구린 영화를 위해서 저질 감독은 너를 어떻게든 다시 살릴 수 있을거야… 그러나 나의 삶은 그런 종류의 영화가 아니었으니, 나는 그냥 내 가슴을 이렇게 짓누르면서 신음할 뿐이지. 이제 어린 자아의 시간은 지났으니까 넌 좀 제발 사그러들어달라고, 이렇게 다 자란 나를 위해.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삶의 완전히 반으로 접히지 않았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싸움, 이제 그 반으로 접힌 삶마저 어둠의 저편으로 조금씩 수렴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오랫동안 그들이 싸워왔던 그 어린 자아가 뼈와 지방과 살갗을 뚫고 가슴팍 한가운데로 뛰쳐나와 그들의 삶을 다시 지배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고통을 모른다. 영화에서 사람들은, 에이리언 새끼들이 뛰쳐나온 다음에는 해방과도 같은 끝을 맞이하던데, 우리의 삶은 그 다음에도 조금, 아주 조금 더 길다. 그래서 그렇게 삶이 저물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아니 나는 두 겹으로 슬퍼한다. 첫 번째 겹은, 그렇게 잠식당한채로 삶의 저물어가는 길을 걷는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두 번째 겹은, 싫어도 숙명처럼 같은 길을 걸을 나와, 운이 좋다면 내 옆에 있을 사람을 위해. 피하고 싶어도 우리는 피할 수 없고 차라리 영화에서처럼 주름도 없이 작고 귀여운 존재로 떠나고 싶어도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는 우리에게 남은 건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온 몸에 가득한, 그 어린 자아와 한 평생 벌였던 싸움의 흔적과 같은 주름, 시간이 이렇게 가혹한 것인줄 진작에 알았다면, 황새가 나를 데려가려고 했을 때 승차거부라도 했었을 텐데, 안타깝지? 히히. 나도 정말 속은 줄 몰랐어, 나를 태우고 왔던 황새도 이 삶에 끝이 있다고는 입도 뻥긋 안 했거든, 나쁜 새끼, 아니 새새끼.
# by bluexmas | 2009/08/05 01:39 | — | 트랙백 | 덧글(6)
비공개 덧글입니다.
어제는 술이 좀 많이 쓰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