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의 추억
인간만사가 새옹지마라는 거야 뭐 거의 진리에 가까운 거라지만, 물건의 만사도 새옹지마라고 할 건덕지가 있을까? 요즘 잘 쓰고 있는 사진의 접이식 손수레를 보면 그런 생각이 가끔 든다. 원래 저 녀석은 짐이 나가던 날 모든 안 쓰는 물건들을 쓸어 버렸을 때 어쩌다가 짐에 벌써 들어가버렸던가, 해서 바다까지 건너오게 되었다. 아니면 버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하지 못해서 그냥 싸서 들고 왔던 것이었을지도…
하여간, 여기에서 뭐 저런 수레를 쓸 일이 있겠냐고 생각했는데, 요즘 정말 잘 쓰고 있다. 집에서 늘 장을 보는 이마트까지는 걸어서 십 오분 정도? 여섯 병들이 2리터 삼다수 팩이라도 사야 되는 날이면 저 수레가 없이는 안된다. 찾아보니 만 오천원에서 이 만원 정도 하던데, 버리고 와서 여기에서 다시 샀더라면 또 얼마나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사실, 미국에서도 저 수레는 거의 쓴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세 달에 한 번 정도 아침 당번이 되면 음식을 만들어 아이스박스에 넣고, 그 아이스박스를 수레에 얹어서 주차장에서 사무실까지 가져가는 정도? 장이야 뭐 늘 차로 봐서 싣고 다녔으니까.
저 수레를 산 동기는 실로 엉뚱했다. 처음 막 대학원에서 새 학기를 시작할 때, 모든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담당교수와 학사 상담을 거쳐, 학부에서 들은 과목들에 대한 평가를 받고 그 결과에 따라 어떤 과목은 듣고 또 어떤 과목은 듣지 않는가를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나도 오리엔테이션 첫 날에 교수랑 상담을 했는데, 워낙 한국 학생들이 잘 오지 않았던 학교이다 보니 교수들이 지식도 없고 해서 학부에서 들었던 과목들 대다수를 다시 들어야 한다고 자기들끼리 윤곽을 잡아 놓았던 것. 처음이라 영어도 정말 제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 그런 과목들은 벌써 다 들었고, 나는 빨리 졸업을 하고 싶다고 얘기를 해도 교수는 요지부동이었다. 학교 측에서도 학생들을 학교에 오래 붙잡아 놓아야 돈을 버니, 굳이 ‘아 그래 너는 이거저거 다 들었으니까 여기에서는 듣지 말고 ##학점만 따서 졸업해’ 라고 선심을 베풀어 줄 이유가 없고. 그러나 나는 2년 이상 학교에 있기 싫었기도 했고 무려 10년 전에 들었다가 개박살난 과목들을 다시 들을 수도 없는 노릇, 일주일인가 있다가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일단 자리를 떴다.
미국에 들어온 건 월드컵이 막 끝난 뒤였고, 학기는 45일인가 뒤에 시작했으니 짐도 벌써 도착을 했겠다, 나는 짐을 뒤져 일단 쓰지 않아도 그런 경우를 대비해 모조리 싸들고 온 학부 시절의 교과서를 꺼내 과목 별로 정돈을 하고, 대학원의 수업 목록에서 호환되는 과목을 찾아 다이어그램을 그려 각자 과목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만든 뒤, 학부 교재의 목차를 영어로 날림 번역했다. 그렇게 해서 추려낸 책이 대강 열 권이었던가? 나에게 할당된 주차장에 과 건물까지는 300미터 정도가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한 번에 그 책을 모두 옮기기를 바랬고, 결국 타겟에 가서 사진의 수레를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 책을 모두 들고 다시 면담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내가 생각하기에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과목들을 면제받았다. 그리고는 여름학기를 유럽에서 듣는 것까지 합쳐 2년 만에 석사를 마쳤다. 그래서 사진의 수레를 쓸 때 마다 완고했던 교수랑 진땀을 뻘뻘 흘려가며 정말 되도 않는 영어로 손짓발짓, 한 과목이라도 덜어내려고 발악했던 생각이 난다. 그것이 바로 내 수레의 추억.
(다 쓰고 나니까 어째 썼던 얘기 같군. 요즘은 이런 게 너무 많아서 뭘 써야 될지도 잘 모르겠다-_-;;;;)
# by bluexmas | 2009/07/30 23:31 | Life | 트랙백 | 덧글(11)
정역학, 동역학, 진동학, 열역학 등등의 역학 쓰리즈…^^;;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줄 아는 사람의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