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지각 사바욘님 티 파티 후기-기나긴 맛보기 코스
사진이 없었더라면 사바욘님 주최로 멋진 티파티를 했다는 사실 조차 잊을만큼 시간이 흘렀다. 먼 호주에서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위한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기 쉽지 않은 여건에서도 기억에 남을만한 음식을 만들어 주셔서 꼭 후기를 올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그러나 늦더라도 꼭 시간을 들여 기록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벌써 한 달도 더 전인 6월 20일 토요일 저녁, 모처에서 사바욘님께서 음식을 만드셔서 조촐하게 파티를 했는데 가벼운 전채격의 음식 35%, 그리고 단 후식류가 65%정도로 이루어진 일종의 맛보기 코스였다. 사바욘님께서 페이스트리 쉐프이신 관계로 전체적으로 후식에 치중되었다. 처음에 블로그에 공고하신 것과 전체적인 순서가 조금 달라서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는 것도 있으나 그냥 최선을 다해 짚고 넘어가 볼 생각이다.
1. 오렌지 그래니타
레몬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확인해보니 오렌지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오렌지였던 듯… 비가 오는 눅눅한 날씨여서 처음 시작이며 palate cleanser로는 딱 맞았다. 다음 음식을 먹을 때 까지는.
2. 튜나 리가토니
사진을 안 찍었는데, 0.5센티 미터 정도로 깍뚝썰기한 참칫살을 추측하기로 올리브 기름, 소금, 후추, 그리고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을 때 레몬즙이었을 산으로 버무린 tuna tartare를 펜네보다 조금 더 굵은 리가토니 삶은 것에 넣은 전채. 참칫살에 기름기가 많다는 걸 감안할 때, 지방의 느끼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레몬즙(또는 그 무엇이라도, 개인적으로는 라임즙 선호)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데 어느 정도의 레몬즙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첫 번째 오렌지 그래니타의 신맛이 혀에 남아 있어 참치에 들어갔을거라고 짐작되는 산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말하자면 혀가 벌써 강한 신맛에 적응되었다고나 할까? 따라서 전반적으로 예상보다 느끼한 느낌이었다. 식감의 조화나 대조를 생각해볼 때 리가토니가 알 덴테로 삶겨지는 게 맞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나에게는 별 무리가 없었다. 리가토니도 그렇고 참치도 그렇고 소금간이 약간 더 되어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인상이 아직도 남아있다.
3. 쇠고기 등심을 얹은 카나페
쇠고기는 씹는 맛이 좋은 상태와 약간 질긴 상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 정도로 조리된 쇠고기의 받침 vehicle-텔레비젼에서 늘 이 밑에 까는 무엇인가를 vehicle이라고 묘사하던 기억이 났다-으로 쓰인 과자가 단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더 뒤에 오리고기로 기억되는 고기에 감자 무스(그냥 으깬 감자?)와 퍼프 페이스트리로 짝은 맞춘 전채가 나왔는데, 그것처럼 퍼프 페이스트리나 아니면 보다 더 부드러운 받침을 썼더라면 식감의 대조가 훨씬 더 두드러지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다. 퍼프 페이스트리를 두 번 쓸 수 없다면, 이 쇠고기에 퍼프 페이스트리를 쓰고, 오리고기에는 크레이프를 써서, 으깬 감자와 함께 말이를 만들어도 좋았을테지만(아니면 크레이프 쇠고기 말이도 좋았을 듯), 그건 뭐 장비가 잘 갖추어진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일테고.
4. 베이컨을 곁들인 완두콩 죽
한참 완두콩이 제철이었으므로, 제철 재료를 쓴다는 의미에서 탁월한 선택.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육수를 바탕으로 만든 완두콩 죽에 바삭하게 기름을 뺀 베이컨 조각을 곁들였다. 완두콩은 그야말로 알 덴테로, 약간 씹히는 맛이 있게 잘 조리되었고, 그렇게 씹히는 완두콩과 완전히 갈린 완두콩의 식감 조화가 훌륭했다. 이 날 먹은 음식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가운데 하나.
5. 오리고기(정말 오리고기였나? 헛갈린다…)와 으깬 감자를 올린 퍼프 페이스트리
밑받침인 퍼프 페이스트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운데를 살짝 접어 한 입에 넣으면 퍼스 페이스트리의 바삭한 질감과 으깬 감자의 부드러운 질감, 거기에 적당히 쫄깃한 오리고기가 한데 잘 어울러지던 전채. 퍼프 페이스트리와 감자 모두 풍성한 맛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쇠고기 등심 카나페와 좀 재료 교환을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감자는 아주 살짝 짰다.
6. 프랑스식으로 재해석된 비빔밥
이 날 먹었던 모든 음식 가운데에서 가장 참신하다고 생각했던 것. 원반형으로 뭉친 쌀뻥튀기에 고추장소스, 시금치와 숙주, 그리고 연어를 올렸다. 입에 넣으면 쌀 뻥튀기의 바삭함과 연어를 부드러움이 식감 면에서 잘 조화를 이루고, 또한 맛 역시 쌀뻥튀기에 살짝 감도는 단맛과 연어를 짭짤함이 단맛-짠맛의 조화를 균형있게 이루었다. 시금치는 괜찮았지만, 숙주는 신선함이 조금 가신 느낌이었고, 두 나물 모두 마늘의 그림자가 조금 짙은 느낌이었다. 시금치나 숙주를 무칠 때 개인적으로는 마늘을 많이 넣지 않는 편이라서, 이 느낌은 어쩌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7. 프로방스식으로 재해석된 냉면
아쉽게도 면이 너무 삶겨져 곤죽처럼 느껴졌다. 사바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걸로 얼핏 들었는데, 국물과 합치니 식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국물의 느낌이 흐려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8. 호박 무스
날이 흐리고 비가 오면 또 다른 느낌으로 이런 종류의 음식이 다른 때보다 더 기쁘게 다가온다. 거의 호박죽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9. 파프리카 아이올리를 바른 토스트
나도 아이올리를 만들어 본 적은 없어 찾아봤더니, 올리브 기름과 마늘을 함께 절구에 갈아서 거의 마요네즈와 같은 상태로 만드는 이탈리아의 소스라고… 나는 아이올리=마요네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통적으로 만드는 아이올리에는 유화제 emulsifier의 역할을 하는 계란이 조금 들어가거나 거의 안 들어간다고. 계란을 넣을 경우에 아이올리는 마늘을 넣은 마요네즈 격으로 인식이 된다는… 하나 배웠다. 맛도 맛이지만 여기에서는 색의 조화를 얘기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사바욘님 말씀으로 파프리카를 섞었다는 아이올리를 바른 토스트를 배경으로 노란색과 빨간색의 생 파프리카(피망? 피망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온 걸까…)의 색 조화가 귀엽다.
10. 토마토 바질 그래니타
바로 앞의 토스트에 바른 아이올리가 마늘 맛을 강하게 풍기므로, 그 맛을 계속해서 이어질 디저트를 위해 잡아주는 palate cleanser. 토마토와 바질의 조화는 맛의 생생함이라는 측면에서 또 다른 하나의 진리. 토마토가 가지고 있는 신맛이 계속 이어진 음식들의 행렬을 끝내기에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모임 장소를 내어주신 주인집 내외의 옥상 정원에서 자라던 싱싱한 바질은 최고.
그럼, 여기에서 부터는 디저트.
11. 블루치즈 체리 타르트
파랗게 핀 곰팡이 때문에 블루치즈라고 그랬던가? 그 파란 곰팡이 덕분에 블루치즈는 상당히 강한 냄새의 치즈에 속한다. 체리도 직접 조리셨다고 들은 것 같은데, 어쨌든 총체적인 부드러움의 향연.
12. 파인애플 밀푀유
거듭 말하게 되겠지만, 전반적으로 디저트가 좀 많이 단 편이었는데, 이렇게 과일과 커스터드로 기억되는 크림을 곁들이는 디저트의 경우 설탕의 단 맛이 너무 강하면 곁들인 과일의 신맛이 죽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바삭한 위 아래의 과자의 바삭함과 커스터드 크림-파인애플 커스터드 크림이었던건가? 맛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의 부드러움, 그리고 그 가운데 낀 과일의 탱탱함이 좋았다.
13. 와일드베리 체리 수플레
수플레 종류의 디저트는 오븐에서 갓 나온, 예쁘게 부풀어 있는 모양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꺼지기 전에 먹어야 제맛. 라미킨을 파고 들어가 바닥에 이르자 설탕이 씹혔다.
14. 복숭아 파르페
늘 파르페, 하면 학창시절에 소개팅 나가서 상대 여학생에게 선심 쓰듯 사주던 그 큰 유리잔의 아이스크림 범벅만을 생각했던지라… 찾아보니 사실은 일종의 얼린 커스터드였다. 계란이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계란보다는 유제품의 부드러움이 더 많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의 뒤에 남는, 향긋한 복숭아의 여운.
15. ?
블로그에 올리신 목록에도, 현장의 목록에도 나와 있지 않아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케잌이었다. 티라미스는 아닐텐데, 뭐였지? 하여간 맛이 풍성해서 밤으로 흘러가면서 졸음을 느끼다가 잠이 확 깨더라.
16. 초코무스 아마레또
사바욘님께서는 아모레또하고 하셨는데, 내 생각에는 아마레또가 아니었을까… 사실은 요즘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마카롱을 계획하셨는데 가루 설탕에 밀가루가 들어가 있어 원하는 상태로 과자가 구워지지 않아서 마카롱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걸 만들 수 없으셨던 듯. 느낌은 내가 아는 아마레또와 마카롱의 중간에서 살짝 마카롱쪽에 기운 느낌이었다.
17. 초코 사블레
우리가 아닌 그 ‘사브레’ 의 원판 격이겠지. 나도 사브레는 몇 번 만들어 본 적 있는데 저렇게 두 가지 재료로 반죽을 따로 해서 소용돌이 치는 건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18. 오렌지 그래니타
수미쌍관? 다시 오렌지 그래니타에 바질잎을 살짝 곁들였다. 하지만 이게 처음 나온 것과 같은 그래니타였는지, 아니면 무엇인가 다른 재료가 들어간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쉽게 구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무엇인가 박하가 곁들여진 palate cleanser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
잘 모르지만 어림짐작하기로 식당과 일반 가정의 부엌은 워낙 달라서, 모르긴 몰라도 일반 가정의 부엌에서 저렇게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시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은 아니셨을터라… 그걸 알면 잘 먹고 좀 더 빨리 후기를 올렸어야 되는데 너무 늦어졌다. 다음에도 오시면 또 뵙고 같이 음식 나누었으면 좋겠고, 아울러 역시 늦었지만 자리 내어주신 r 아무개님 내외분께도 감사드린다.
참! 시저 샐러드를 빼 먹었는데, 사진도 안 찍었더라. 기억하기로 카레 가루로 생각되는 향신료가 드레싱에 섞인 것 같았는데 닭고기가 아주 부드럽게 잘 익었고, 크루통은 조금 단단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간은 약간 짠 편.
# by bluexmas | 2009/07/27 13:23 | Taste | 트랙백(1) | 덧글(4)
제목 : 피망은 어디에서 온 말인가.
어휘 전공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조사해볼 수 있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간만에 이런저런 종이사전들을 꺼내보고 넷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걸음마도 아닌 기어다니는 수준의 프랑스어까지 총동원하여 알아낸 것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니 들인 품에 비해 소득이 지나치게 적달까, 그다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는 듯-_- 아니 혹시 나만 모르고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거나…으음. 1. ‘피망’은 일본이 받아들인 외래어가 그대로 ……more
스스로도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는데
객관적인이야기를 들을수있어서 좋았네요.
몇가지 덧붙이자면 파프리카 마요네즈는 루이라고 불리며
프로방스 냉면도 원래는 쫀득한느낌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곤죽같은 면이 프로방스에 가까울것같아서^^;;
그리고 케익은 카카오닢 오페라였습니다
신기한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