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넌 일요일 오후

여느 일요일 처럼 운동을 마치고 허겁지접 점심을 쑤셔 넣은 뒤, 강남행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역삼역 모처에서 시간을 좀 보낸 뒤, 여느 때라면 코엑스몰 쪽으로 향했을 것을, 인터넷을 뒤져 4번 출구 앞에서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넜다. 오랜만에 이태원에 가보고 싶었다.

그 오랜만이 얼마나 오랜만이냐하면… 지하철 6호선이 뚫리기 전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니까, 아마도 십 오 년 정도? 물론 몇 년 전에 거시기한 일로 그 근처를 몇 번 가보기는 했지만, 외국인을 상대로 한 가게가 있는 이태원 중심가는 거의 십 오 년만이었다. 몇 번 갔었던 것도 주로 그 당시에는 구하기 힘들었든 큰 치수의 옷을 사러… 언제나 그 시절의 얘기를 하는 건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비밀 따위를 얘기하는 기분이지만, 어쨌든 그때에는 맞는 옷을 찾기가 힘들어 이태원에 몇 번 갔었다. 그러나 또 거기에서 파는 곳들은 몸통이 대강 맞아도 팔이 길어나 손목이 넓거나 해서 어쨌든 이상해 보이는 옷들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 그런 옷들을 입는 건 참으로 암울했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으로 갔었던 게, 헤비메탈 클럽이라는 곳에 크래시의 공연을 보러였던 것 같다. 그때 하이텔 메틀동 몇몇 사람들과 같이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삐삐가 간신히 있던 시절 연락도 없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은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무슨 서태지 팬클럽 회장인가 하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달고 텔레비젼에 나오더라. 서태지랑 비슷하게 안경까지 쓰고서는. 그러나 누구였던지 간에 나는 그 사람을 그저 약속을 말도 없이 안 지킨 사람으로 기억할 뿐이다. 그 사람이 죽거나 내가 죽을때 까지.

어쨌든 녹사평역에서 730번을 내려 해방촌 앞 길을 죽 걸어 가끔 지나가면서 보던 음식점들을 들여다 보았지만 솔직히 들어가서 뭔가 먹고 싶은 집은 무슨 피자집 하나 밖에는 없었고, 나는 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 중심가를 반쯤 걸었지만 호객하는 사람들이 많은 그 끈적끈적한 분위기가 싫어서 곧 발걸음을 돌려 크라운호텔 앞까지 다시 걸어내려와서는 143번을 타고 다시 강을 건넜다.

사진은 그냥 아이폰으로 찍은, 의미도 없이 허접한 것. 사실은 옛날 마장동에 살때 77번 타고 한강 건널 일이 꽤 많아서 그 때 찍은  강 사진들도 뒤져보면 꽤 많을거다. 그때도 일요일 오후, 오늘 강을 건넜을 때와 비슷한 시간에 참 많이도 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그때 눈 먼 돈으로 얻어먹은 비싼 음식 사진찍어서 요즘처럼 블로그에 올렸어도 한 일 년 올렸겠네,흐흐. 그럼 나도 메이저 ‘식당 블로거’ 될 수 있었을지도. 음식 블로거도 아닌 식당 블로거가 되려면 비싼 음식 관련 글과 사진을 많이 올려야 사람들의 부러움도 사면서…

 by bluexmas | 2009/07/20 00:49 | Life | 트랙백 | 덧글(13)

 Commented by 펠로우 at 2009/07/20 01:07 

오늘은 더위에 스모그 안개가 끼어서, 걷기가 좀 어려웠을 거에요^^ 호객 분위기를 피하려면 그 이태원 북쪽 길로 걸으면 됩니다. 남쪽길에 호객이 많죠. 좀 스타일 있는 곳은 해밀턴호텔 뒷골목, 그리고 소소한 곳은 해밀턴호텔 건너편의 골목에 있으니, 다음엔 충분히 즐기세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7/20 01:17

뭐 걷는데에는 이골이 나서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만, 저는 워낙 호객꾼을 악마의 사자 정도로 보는 사람이라서요… 옛날에 산꼭대기 어딘가의 하루에 같은데에서 빙수였나 커피 먹던 생각도 나고 해서 담에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발품을 팔아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같으면 3 앨리에서 맥주 한 잔 같이 하시죠^^

 Commented by 조신한튜나 at 2009/07/20 15:42 

제겐 그 어떤 허세포스팅보다 bluexmas님 포스팅이 훨씬 알찬데…

요리실력도 좋으셔서 이미 만인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계시구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7/20 23:05

앗 만인의 부러움이라니 손발이 사정없이 오그라들어서 타자치기가 힘들어요. 어제 서울 오셔서 맛집 순례는 잘 하셨나요?^^

 Commented by 조신한튜나 at 2009/07/20 16:03 

에구 모든 비싼음식 포스팅이 허세라는 건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에잇 어쨌든 그렇다구요ㅇ>-<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7/20 23:05

네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비싼데에서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 좋죠 뭐.

 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09/07/20 16:16 

아이폰, 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다른 모든 문단과 문장들이 사라지고 번뇌만 남았습니다. 아아, 지난 설 연휴에 무조건 사왔어야 했던 것을…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7/20 23:06

우리 나라에도 곧 들어온다고 하던데요? 저는 쓰던 아이폰에서 전화기 기능만 죽여놓고 그냥 이런저런 용도로 쓰는데 그래도 이것만한 개인용 기기가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User Interface는 애플의 제품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이구요.

 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09/07/21 01:19

문답무용. 지난 설에 대만에 있었는데, 만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작년부터 열망하고 있었지만, 그날 손에 잡혔던 감촉과 사용감이란… 무조건 사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너무 부럽습니다. 우리나라는, 약 2년에 걸친 무수한 떡밥에 지쳐 거의 실성 상태입니다. 저뿐 아니라 대기수요자 모두…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7/22 00:06

사실 아이팟 터치가 있기는 하지만, 또 저도 제 전화기를 그렇게 쓰고 있기는 하지만, 전화기로 쓰지 못하면 한 40%는 못 쓰는 셈이죠… 우리나라에도 곧 나오지 않을까요?

 Commented by 제이 at 2009/07/21 00:28 

어제 이태원에 있었다지요. 하하;

전 해밀턴호텔 길건너. 이슬람사원쪽으로 가서 호객꾼을 못 봤나봐요. 쉐프마일리에서 햄,살라미 조금사고 살람베이커리까지 걸어갔다가 넘 더워서 ;; ㅠㅠ

뒷골목에는 무섭지만 착하게 생긴 흑인가족들이랑 더 무섭게 생겼는데 착하게 길가르쳐준 이슬람오빠들이 많더만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7/22 00:07

일요일에 이태원 계신 분들이 많았네요 🙂 거기에서 페페로니도 살 수 있나요? 사다가 페페로니 피자를 구워 먹고 싶네요. 그 동네에 무슬림들도 많은가봐요.

 Commented by 제이 at 2009/07/22 01:38

http://catail.egloos.com/4813143

이분 포스팅을 참조해주세요. 무슬림이 많은건 이슬람사원이 있어서 그럴거에요. ^^ 살람베이커리에서 사온 터키?이슬람과자도 맛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