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람들을 만나서 즐겁게 수다를 떨거나, 아니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와는 아주 특별하게 상관이 없는 글들을 연달아 쓰고 나면 갑자기 나 자신에 대한 얘기를 쓰기 어려운 상황이 찾아오곤 한다. 뭐 사실 그것보다는 어제 마신 술이 속을 쓰리게 만들 만큼 많은 것은 아니었어도 하루 종일 무기력하게 잠을 자도록 만들 정도여서, 머리도 하루 종일 쳐 자다 보니 잘 안 돌아가서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가끔은, 이 블로그라는게 내가 썼지만 나와 전혀 상관없거나 내가 아닌 글로만 가득차는 상황을 경계하게 된다. 네가 쓰면 다 네 얘기 아니겠냐고 누군가는 되묻겠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어째 오늘은 아무 것도 쓰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왠지 그게 아쉬워서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컴퓨터 앞에 돌아와 앉기는 하지만 쓰고 싶을만큼 내키는 건 하나도 없다. 시작도 알고 끝마저 아는 얘기는 쓰기 전부터 지겨워져서 차마 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작은 알아도 끝을 모르는 얘기를 더 많이 쓰고 싶다. 끝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시작해서 거기까지 나아가야 할지 아직은 모르는 얘기도 더 많이 쓰고 싶다.

날씨도 덥지 않은데, 혈압이 낮아져서 어째 심장이 몸 말단부까지 피를 제대로 펌프질해 보내지 못해 무기력한 것과 같은 느낌에 종일 시달렸다. 다 늦은 밤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 초콜렛 아이스크림의 원액을 만들었는데, 잠시 초콜렛 냄새를 맡고 몸이 깨어나는 듯하다가 다시 사그러들었다. 남비와 또 하나의 대접에 초콜렛과 크림, 우유와 계란 노른자, 그리고 설탕을 섞은 걸 이리저리 옮겨 가면서 원액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만든 모든 재료를 합쳐서 원래의 냄비에다가 담아 냉장고에 넣고 바닥에 깔린 원액의 찌꺼기에 우유를 섞어서마셨다. 단 걸 좀 먹으면 몸이 깨어날까 싶었지만 별 차이를 못 느꼈다. 커피를 마시면 될 것 같지만 그러면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차마 마실 수가 없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커피부터 내려 마셔야겠다.

바람이 시원해서 다행인 며칠이다. 어머니가 좋은 감자를 사다놨으니 가져가라고 문자를 보내셨지만 응답하지 못한 채 소파에 널부러져서 책을 계속 읽었다. 그러나 머릿 속으로는 어제 서울로 가는 지하철에서 읽은 다른 책의 내용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오랫만에 읽은 건축 이론 책이었다. 시작은 시각이 다른 감각에 비해 점유하고 있었던 우월함에 대한 얘기였다. 내 머리는 과연 다시 이런 쪽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오늘 집에서는 스시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계속 촉각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몇 십 쪽 밖에 읽지 않았지만, 어째 나는 벌써 그 책에서 펼치고자 하는 논지에 동의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아까 낮에 Random Playlist를 간만에 만들었으나, 그게 요즘 말 많은 저작권법 위반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 올리지 않았다. 이제 내가 만든 노래라도 올려야 되는 때가 온건가?

 by bluexmas | 2009/07/04 23:43 | Life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by 사바욘의_단_울휀스 at 2009/07/04 23:56 

뭔가 간직하고 싶은 능력이있으면 상황에 관계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것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어느새 다른 사람이 되어있더라고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7/05 00:07

그렇지요. 한 번 사는데 또 다른 사람으로 살 수는 없는거죠…

 Commented by midaripark at 2009/07/05 17:19 

남들 흘려보내는 순간들 하나하나 묘사하고 해석할 줄 아는 그대가 진정한 작가-

시작은 알아도 끝을 모르겠는 이야기,

끝을 정해 놓고도 어찌시작해야할지 모르겠는 이야기 더 많이 쓰겠다는 말 그대로 되길!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7/06 00:25

으하하 민망하게 왜 그러세요 T_T

담에 뵐때는 또 다른 빵을 가져다 드릴께요 🙂 너무 즐겁게 먹고 놀아서 다음날은 정말소파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