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와인 가난뱅이의 열폭
지난 일요일, 아무 생각 없이 무역센터 현대백화점에 들렀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포도주 할인 판매를 한다길래 들여다 보다가 예전에 즐겁게 먹었던 몇 녀석들을 발견했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가장 싼 놈을 집어들었다. 정가는 이만 이천원인데 할인해서 만 삼천 이백원. 그만하면 예전에 먹었던 가격을 생각해 볼 때 나쁘지 않다 싶어서 집어 든건데, 계산을 기다리며 옆에 서 있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를 보니, 뭔가 알지도 못하는, 가격이 분명 여섯자리일 법한 녀석들 몇 병을 계산대에 올려 놓고는 직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데, 보니까 그 계산하는 직원은 나이가 어려 보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소믈리에 딱지를 달고 있었다. 순간 뭐랄까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듯한 기분이… 내가 집어든 건 만 삼천 이백원인데, 만 삼천 이백원… 그것도 이만원짜리 사려다가 좀 비싸다 싶어서 집어 든 만 삼천 이백원… 아아, 가슴 한 구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열등의식의 모닥불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계산하고 나오는거지 뭐. 그 소믈리에 소년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싸다고 아무 거나 집어 들지는 않았다구, 적어도 내가 뭘 마시는지는 알고 산… 아아 이것도 너무나 자격지심에서 하는 얘기 같구나, 울고 싶다 T_T
워낙 다들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붙여서 팔고 있는지라 어쩌다가 들여다 보거나 또 혹해서 사게 되더라도, 먹어 보거나 정확하게 얼마인지 알고 있는게 아니면 절대 손대지 않는다는, 굉장히 초라한 구매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프랑스산은 통과. 애초에 나는 늘 사서 마실 때에도 프랑스산은 안 마신다는 자격지심에 가득차서 세워 놓은 원칙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른 술은 안 그럴 텐데, 어째 이 포도주는 옛날부터도 신분이나 계급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고, 아직도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경향이 계속해서 지켜지는 이유는, 모르긴 몰라도 수입을 선택적으로 해서, 이윤이 많이 남지 않을 법한 가격 저렴한 녀석들은 그렇게 많이 들여오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달리 말하자면 대중화, 대중화 해도 정말 대중화에 기여할 만한 녀석들은 안 들여오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는 얘기다. 물론 세금 포함 10불 짜리-누구나 다 아는 콜럼비아 크레스트의 그랜드 이스테이트 멀롯-가 이만 칠 천원 넘게 팔리니 얼마 이하로 가격이 내려가기는 어렵겠지만, 그것보다 더 싼, 6-7불 짜리 스페인이나 칠레산도 좋은 것들이 많았는데, 그런 것들은 수입경로를 개척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아예 개척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어느 종류도 본 기억이 없다. 미국산역시 수퍼마켓에서 파는 로버트 몬다비 싸구려들 말고도 7-8불 안쪽에서 살 수 있는 것-워싱턴산-들이 꽤 있었는데, 그런 것 역시 거래처가 없는지 찾아 볼 수가 없다. 하긴, 와인 마시려면 적어도 프랑스말로 딱지 붙어 있는 것 정도는 마셔 주셔야 뽀대가 난다고 생각들 할지도 모르니…
물론, 주세를 포함하더라도 가격의 어이 없음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더 악화시킨다. 할인한답시고 내놓은 캘리포니아 진판델 하나-내 없는 예산에 가장 맛있게 마신, 그리고 지금도 아껴서 한 병 가지고 있는-는 할인가랍시고 붙여 놓은게 칠만 오천원이었는데, 싸게 구하면 20불 아래로도, 또 아무리 비싸도 25불 위로는 팔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게 할인가로 칠만 오천원이라면, 주세가 백 퍼센트 붙었다 쳐도(물론 난 포도주에 주세 몇 퍼센트 붙이는지 모른다), 또 도매가는 소매가 보다 쌀거라고 감안해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가격 책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세금 따위의 국가에서 통제하는 것 외에도 가격 책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꽤 될 텐데, 이런 것들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길래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술들이 나오는지 궁금할 수 밖에 없다는…
뭐 어쩌겠어, 돈 없으면 안 마시면 그만이지.
열폭에 가득찬 잡설은 잔뜩 늘어놓고 정작 산 술 얘기는 안 했는데, 이건 스페인의 리오하로 만든 백포도주. 재작년 여름에 마셔보았던 것이다(찾아보면 글도 있을 듯, 그러나 찾기 귀찮다). 언제나 그래왔듯 달지 않은데 뒷맛이 솔잎의 그것처럼 쌉쌀했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았다. 뭔가 있어 보이려면 세비체 따위를 만들어 먹으면 된다고 말하고, 그게 싫으면 그냥 아주 맵지 않은 오징어 무침 정도면 잘 맞을 것 같다. 아니면 해파리 냉채 정도?그 쌉쌀한 뒷맛이 지방의 느끼함과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춰줄 수 있을 것 같으니 어디에선가 보았던 족발 냉채 따위를 해서 먹어도 잘 맞을 것 같다. 금주기간 끝나고 마시게 되면 다시 글을 올릴 예정.
# by bluexmas | 2009/06/11 09:01 | Wine | 트랙백 | 덧글(10)
전 계산대 앞에 늘! 항상! 당당합니다 🙂
물론 대원칙은 마셔서 기분 좋은 것이 장땡, 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요즘 금주라 살짝 괴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