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밤
차를 위해 친구와 나는 택시를 잡아 타고 홍대로 향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바글바글거렸지만 의외로 술집은 한산했다. 고르기 귀찮아서 아무데나 들어갔는데, 정말 아무데나였다. 향이 더해지지 않은 그냥 앱솔룻도 없는 아무데나. 그러니까 그렇게 넓은데 손님이 하나도 없지. 배 향 앱솔룻을 마셨는데, 그 플라스틱 느낌이 나는 배 향이 싫어 두 번째 잔 부터는 위스키를 마셨다. 맥켈란? 난 위스키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는 에반 윌리엄스라고, 초 싸구려. 잭 다니엘 이웃 사촌 혹은 서로 총질해서 죽여버리고 싶은 라이벌 같은 싸구려다.
건물 1층을 전부 차지해서 넓은 술집에 손님이라고는 친구와 나, 그리고 단골이라는 웬 양복입은 아이가 있었는데, 바에 있는 두 아리따운 여성분들께서는 그 단골과 라면을 끓여 사이 좋게 나눠 드시고는 우리는 본체만체, 그래서 술집에서는 병을 시켜야 손님 대접을 받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병째 마셔주고 싶은 술도 없더라… 그냥 앱솔룻도 없, 아니 사실은 진열대에 지들이 파는 술을 좍 늘어놓았는데 거기 진열된 병 하나가 있었다. 어차피 물 채우나 보드카 채우나 똑같아 보일텐데 손님한테 팔고 물 채워 놓으면 안 되는건가? 아마 병째 시켰으면 얼씨구나 좋다면서 팔았겠지? 그거 진열하시는 건데 팔아도 돼요? 아뇨, 물 채워도 똑같은데 어때요, 손님 드려야지. 생각해보니 더 웃긴게 메뉴판에 무슨 술 있다고 다 써있는데 그걸 또 진열하는 건 뭐냐.
하여간, 시간이 열 시 반을 넘어 열 한 시를 향하고 있었으므로 전철은 글렀고, 택시를 타고 강남역에 가면 고속버스를 타고 갈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술을 마시면서도 창 밖으로 고개를 연신 돌려 빈 택시가 좀 지나가는지 확인했다. 그리하여 친구와 헤어진 시간은 열 한 시. 다행스럽게도 바로 택시를 타고 강남역으로 향했다. 도로는 자정을 향해 가는 시간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군데군데 막혔다. 기사 아저씨는 라디오를 틀어 놓았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긋나긋했고 또 사근사근했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서 현실에서 감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그것이 아닌 듯 들렸다. 비도 구질구질하게 오고, 차도 막히고 또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무엇이 원인인지도 상관 없는 고통으로 소리죽여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밤에 여자의 목소리에는 마치, 어느 정도 이상의 고통 따위는 거부하겠다는, 이 세상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그것도 아니면 자기와 상관있을 법한 무엇인가로 여기지 않겠다는 단호함 비슷한 감정이 서려있는 듯 들렸다. 아무개 씨, 많이 생각해 봤는데, 당신 좋은 사람이니까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날거야. 나 먼저 일어설께. 계산하고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구. 뭐 이런 상황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연출할 수 있는 그런 단호함을 지닌 여자의 목소리. 감색 치마 정장에 하늘하늘한 흰 블라우스, 검정 단화면 정말 더 그림이 되겠지. 나는 그냥 생각만 했다. 당신은, 거짓말도 진실처럼 말할 목소리를 가진 것 같은데, 그런 아무나 읽어 댈 수 있는 시시껄렁한 스승의 날 사연 따위는 여성시대에나 줘 버리고, 오늘 날씨와 같이 고통스러운 누군가의 얘기를 하는 건 좀 어때요? 그것도 아니면 바로 당신의 고통을 좀 한 자락이라도 늘어놓아 보던가. 생전 손톱 바짝 깎아서 짜증 한 번 안 난 목소리로 오늘 같은 밤에 남들 다 듣는 라디오 포로그램을 진행하는 건 진실 같은 삶을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나 여자가 내 목소리도 아닌 생각을 들었을리는 없으니, 여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끔찍하도록 나긋나긋하고 또 사근사근했다. 무려 죽은 사람의 노래를 틀던 그 순간마저도. 나는 그걸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택시에서 내려 싸구려 젊음이 가득찬 강남역 거리를 달렸다. 차소리와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얽힌 사이사이로 뒷골목 닭장 모텔에서 밤을 불태우는 그 싸구려 젊음의 일부가 만들어내는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에는 모두가 사랑하고 또 받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러나 그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거짓말…그러나 괜찮아, 지금은 바로 거짓말의 밤.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알았지. 그러니 오늘은 마음껏 스스로를 속이고 또 상대방도 속여 봐, 얼마만큼 어디까지 속일 수 있나 자신을 시험해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싸구려 젊음이 피에서 솟구쳐 주체할 수 없는 나날을 살 때에는. 나는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뛰면서 기분을 달랠만한 노래를 찾았지만 그 어느 것도 나를 흡족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그러나 남은 밤은 길었다.
# by bluexmas | 2009/05/16 01:25 | — | 트랙백 | 덧글(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