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치 아저씨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 아무런 생각 없이 음악을 듣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는데, 바로 옆에 아저씨가 서 있었다. 갈치 아저씨였다. 날렵하게 마른 몸매에 반짝이는 은회색 정장. 짧게 잘라 뒤로 넘긴 고수머리마저 은회색으로 희끗희끗했다.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사뭇 포악한 눈매를 완벽히 그 아래에 감출 수는 없었다. 바다로 돌아가는 길일거야. 아저씨, 저도 데려가주세요, 네? 부탁하고 싶었는데 웬일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저씨 저도… 순간, 눈이 마주친 아저씨는 말했다, 안돼. 단호했다.
네? 나는 아직 채 입도 떼지 않았는데, 아저씨는 벌써? 미안하지만 시기를 놓친 것 같은데? 민물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잖아. 혈관 속에 온통 민물이 흐르고 있는 것, 알고 있지? 에휴, 민물 비린내, 쯧. 살짝살짝 벌려 말하는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갈치다운 이가 슬쩍슬쩍 내보였다. 아저씨는 허리를 살짝 구부리고는 측은함이 밀물처럼 넘실거리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하고는 지하철 문쪽으로 등을 돌렸다. 금정역이었다. 그러므로 가까운 바다는 오이도. 미안, 막차는 놓칠 수 없거든. 아저씨는 스르륵, 열린 지하철 문을 통해 사라졌다.
아저씨! 저 아직 아가미에 소금 많이 껴 있어요, 여기 한 번 보시… 그러나 아저씨는 내가 아가미를 까뒤집어 가득 껴 있는 굵은 소금을 채 보여주기도 전에 갈치답게 날렵한 몸짓으로 스르륵, 눈 앞에서 사라졌다. 쫓아가야 하나? 쫓아가서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빌어야 하나? 아저씨, 저 이게 이곳 민물세계에서의 소금기 없이 싱거운 생활에 지쳤어요. 저도 제발 데려가주세요. 눈물, 눈물을 흘리면 될 것 같은데. 아저씨, 제 눈물 냄새 한 번만 맡아 보세요. 그래도 아직은 충분히 바다스럽지 않나요?
그러나 지하철 문은 닫혔고 전철은 스스륵, 그러나 아저씨의 몸놀림 보다는 몇갑절은 더 둔중한 스르륵의 감촉으로 역을 빠져나가 남으로 향했다. 다음 기회는 언제 또 찾아올까? 내 몸의 소금기는 점점 더 옅어져만 가는데, 이 다음 기회는 정말 기회가 될 수 있을까? 고민으로 깜깜한 밤이 더 깜깜하게 느껴졌다. 가족 아닌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 아닌 집으로 가는 길이 그 때 거슬러 오르던 높디 높은 강 하구둑의 기억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그곳에서 나는 온몸으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둑은 높았고 파도는 약했으며 숨은 가빴던 그때, 그렇게 해서 넘어온 민물 세상은 결국 이렇게 싱거워 빠진 곳일 뿐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 절망에 쩔어 바라본 창 밖으로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 아니 빛나고 있었다. 아저씨는 플랫폼 끝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남하하는 전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뱃불이 언젠가 바다를 거슬러 오던 그 여정에서 보았던 등대의 불처럼 빠알갛게 빛나며 멀어졌다. 깜깜하고 또 깜깜한 밤, 아저씨는 반짝, 반짝이고 있었다. 광채는 빠른 속도로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빠르게 멀어지는 광채의 꼬리를 붙들고 희망 역시 멀어지고 있었다. 그랬구나, 내 몸에는 민물이 흐르고 있었구나. 에휴, 민물 비린내, 쯧. 그렇지 않아도 깜깜했던 눈 앞이 차츰 흐려졌다. 눈물의 큰 줄기가 눈에서 떠나 느릿느릿, 볼을 타고 전철 바닥으로 흘러내렸고 작은 줄기는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여전히 찝찌름한 눈물이었다. 아저씨도 나를 버린채 떠났는데 짠 눈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소금기가 아까워, 소금기가… 나는 가족 아닌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 아닌 집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그곳은 나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어시장, 오늘은 누가 또 나의 내장을 후벼파내고 비늘을 긁은 뒤 회를 떠 맛있게 냠냠 드실까. 와, 이놈 싱싱한데! 회는 역시 민물회라니까. 희망은 오늘 또 다시 타인의 꿈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에휴, 민물 비린내, 쯧쯧.
# by bluexmas | 2009/05/14 00:40 | — | 트랙백 | 핑백(1) | 덧글(10)
Linked at The Note of Thir.. at 2011/05/31 01:53
… 그러니까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드세요. 말씀하신 것처럼, 기록이니 뭐 이런 것에 크게 도움을 받으실만한 상황도 아니에요. 그동안 몸무게가 많이 느신 모양인데요? 갈치아저씨가 알려준 체중이랑 전혀 달라요. 이 정도로 살이 찌신 줄 알았다면 적어도 1개 소대 정도는 더 데려왔을 겁니다. 뭐 예정된 희생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은 있 … more
비공개 덧글입니다.
어두운데 반짝 반짝 거리죠…(한숨) 그런데 문제는 참다랑어인데
왠지 바다가 아닌 수산시장에 누워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삶 속에 파묻혀 있다 보면 언젠가는 바다에 머물렀다는 사실마저 상기하기가 쉽지 않죠. 게다가 얼음은 좀 많이 뿌려대야 말이죠…
새로 사신 정장에 맞는 셔츠를 괜찮은 곳에서 맞추시면 기분이 좋아지실지도 몰라요. 전 옛날에 압구정도에 있는 goshe에서 처음 셔츠를 맞춰 봤는데, 괜찮더라구요. 사실 공장이야 다 거기에서 거기겠지만 가게에 있는 사람들이 친절한가, 또 얼마나 사람들의 궁금증에 화답해주느냐, 공장에 잘 전달해주느냐가 결국 관건일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