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닥다리 소세지 부침과 함께 마시는 낮술
소세지 부침과 ‘함께’ 마시는 낮술이라니, 꼭 소세지 부침이 술 친구 되어 나와 함께 낮술을 마셔주는 것 같잖아. 이봐 친구, 지금 상황에 너무 낙담하지 말라구, 내가 술 한 잔 따라줄테니 쭉 들이키고… 옆의 소세지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술을 따라 준다. 그러나 소세지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 술을 마실 아량 따위는 애초에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내 말인즉슨 소세지 부침을 안주 삼아 낮술을 마셨다는 얘기다. 이봐, 뜻은 고맙지만 나는 너를 부쳐야만 되겠어, 누군가 소원을 빌었거든. 나는 그의 팔을 내 어깨에서 내리고 배에 칼을 꽂는다. 그가 부루투스 너마저도- 따위의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파르르 떨며 눈을 감는다. 나는, 부루크리스마스야, 부루투스가 아니고.
그렇다. 누군가가 소원을 빌었다. 전, 소세지 부침이 먹고 싶어요, 그건 꼭 그 빈티지 빨간 소세지로만 만들어야 해요. 요즘 나오는 온갖 그 뭔가 있어 보이는, 그러니까 굳이 영어로 쿨하게 말하자면 팬시해보이는 ‘계란 입혀 부치면 참 맛있는 소세지’ 따위여서는 절대 안 돼요. 하다 못해 동그랑 땡도 안되고, 심지어는 야채 소세지까지도, 아니, 특히 야채 소세지는 절대 안 돼요. 원래 싸구려인 빨간 소세지에 당근이나 완두콩 쪼가리 따위를 박아놓고 고급인 척 하는 꼬라지가 너무 재수없어서라도 절대 안 돼요.
…헐, 사람들은 보통 비싸고 좋은 걸 못 먹어서 안달내는 경향이 있는데 가끔은 이런 상황도 벌어지는구나, 라고 나는 잠시 생각했지만 뭐 그 정도는 그렇게 들어주기 어려운 소원이 아니니까. 그래서 사실은 어제, 장에 딸린 수퍼마켓에서 마주앙을 사면서 소세지도 함께 샀었던 것이다. 소원을 빈 사람의 말을 좇아 이름도 더럽게 긴 ‘계란 입혀 부치면 참 맛있는 소세지’의 개울을 건너 동그랑 땡의 숲을 지나, 그리고 바로 이웃인 야채 소세지의 오두막 마저도 지나치고서. 사실 나는 야채소세지에 페티쉬가 있어서 그녀의 오두막을 지나치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소원을 빈 사람이 있었으니까. 미안, 야채 소세지. 다음엔 꼭 너를 간택할…
포장을 벗기니 소세지가 그 오랜 기억 속에서 선명히 남아 있던 분홍색 뽀얀 속살을 드러낸다. 그래, 바로 이 색깔이었지. 뜻도 잘 모르고 영어를 남발해서 도색잡지라는 말이 뭔가 있어 보이는 것처럼 들리는 요즘 시대에 쏘세지의 속살은 정말 도색적이다. 그래서 그 색에 잠시 넋을 읽고 손에 소세지를 든 채로 멍하니 서 있다가 늦은 오후, 마루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긴 햇살과 그의 영원한 동반자 그림자, 또 그들과 손 잡고 함께 밀려오는 출출함에 정신을 번쩍 차린다. 오후 네 시 였던가? 해가 부쩍 길어져서 저녁시간까지는 영원이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엄밀히 말해서 이 소세지는 소세지라고 하기 좀 어렵다. 주요 성분이 어육에 밀가루라고 알고 있으니까. 물론 거기에다가 입맛 증진을 위해 글루타민산 나트륨 같은 합성 조미료를 넣어 한참 장안에 회자되고 있는 우마미의 열풍을 저렴하게 좇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것도 무려 30년 전 부터. 저렴, 이라는 말이 나와서 덧붙이는 얘긴데 시장 수퍼마켓 같은데에나 가야 살 수 있을 줄 알고 굳이 거기에서 집어 들고 왔더니 이마트에도 같은 녀석이 있었는데 가격은 무려 320원이나 쌌다. 시장까지 걸어갔다가 걸어와서 차비를 아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소세지를 부여잡고 한 섞인 눈물을 흘린 뻔도.
어쨌든 무슨 가공육이라기 보다는 이제는 떡같은 느낌의 이 소세지를 잘 먹는 방법은, 안타깝게도 원재료의 조악한 질을 감안할 때 절대 없지만, 그래도 소원을 빈 사람이 ‘인류의 친구’ 라고 일컫기를 좋아하는 닭이 낳은 알, 즉 계란을 입혀 약한 불에 지지면 그래도 계란 맛으로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물론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지지는게 좋다. 그래야 계란맛으로 이 암담한 맛의 지옥을 헤쳐 나가지 못할 것 같을 때 기름의 고소한 맛과 느끼함의 도움을 마저 받아 헤쳐 나갈 수 있으니까. 맛의 지옥을 빠져 나가는 길 멀고 멀으니 계란과 기름이 함께 손을 잡으면 요단강 건너 햇살의 언덕…
팬을 중간불에 달구면서 소세지를 석봉 모친 떡 써는 아우라로 짠 저고리라도 입고 썰듯 예쁘게 썰고 계란을 푼다. 소세지를 먹어봤더니 싱거워서 계란에 소금 간을 한다. 소세지는 총 500 그램 인데 절반 250그램에 계란이 정확히 두 개 필요했다.
사실은 소세지 부침에 대한 구상을 어제 저녁 늦게까지 하면서 레시피 구현을 위한 시각적 상상력 동원에 잠시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 당시 상황을 복기해보면 소세지를 계란에 담가 팬에 넣는 과정에서 계란이 소세지에 잘 묻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은 소세지에 밀가루를 묻혀서 계란을 입히면 되겠다, 라고 생각해봤지만, 일단 소세지에 밀가루와 비슷한 무엇인가가 당연히 들어갔기 때문에 또 밀가루를 쓴다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소세지의 조악한 질을 생각해 보았을 때 감히 밀가루를 쓰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사실 계란과 기름 맛이면 조악한 맛지옥 탈출에 충분한 것이지, 이 싸구려 소세지를 위해 밀가루 맛 까지 동원한다는 건 좀… 그래서 고심하다가 소세지를 계란에 담갔다가 팬에 올리면서 숟가락에 계란을 충분히 담아 먼저 계란을 팬에 깔고 0.5초 후, 그러니까 계란이 살짝 익어 형태가 고정되고 나서 소세지를 얹어 계란과 소세지가 붙도록 하는 기술을 동원해봤다. 결과는 일단 개만족, 해서 계란이 익은 후 뒤집어서 반대편을 마저 익힌다. 꼴에 소세지는 육가공품이라 조리가 되었으므로 불에 살짝 익히는 정도로도 먹을 수 있다. 그 먹는 과정이 단지 ‘음식을 입에 넣는다-씹는다-삼킨다’ 라고만 정의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그 뒤에 ‘소화된다-몸에 영양분으로 축적된다’ 나 ‘소화가 안 된다-위나 아래로 그냥 빠져 나온다-기분 더럽다’ 의 과정이 덧붙여지지 않는다면.
소세지를 너무 열심히 부쳤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져서 술 생각을 잠시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냉동실에서 자칭 흑맥주라는 녀석의 큰 병을 꺼낸다. 최적 시간을 조금 넘겨 꺼냈더니 맥주가 꿀럭꿀럭, 편의점에서 파는 슬러시 같다. 정말, 날도 더워지는데 왜 편의점에서는 맥주 슬러시를 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대박날텐데… 아니면 트럭이나 손수레 같은데 맥주 슬러시 기계를 끌고 다니면서 초등학교 앞 이런데에서 팔면… 물론 선생님들한테만.
소세지는 뭐 소세지 맛이고, 그렇다면 맥주는? 요즘 우리나라 맥주 큰 병들을 다 마시면서 한데 모아 글을 써 볼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말을 아끼고 싶지만, 그래도 한 마디 하자면 까맣게 만든 시도는 가상하나 옛말을 빌어 얘가 까매서 흑맥주면 파리가 새라고 정도? 정 흑맥주가 마시고 싶다면 그냥 맥주에 맥심이나 코코아 가루 따위를 타서 마시는 것이 어쩌면 얘보다는 조금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뭐, 맥주 자체로는 나쁘지 않은게 어쨌든 시원했고 알코올이 들어갔으니까… 하지만 멋진 포장 디자인이 아쉽다고 생각될 정도로 얘는 흑맥주의 영혼에게 등을 진 채로 앉아 있었다.
어째 잘 만들었다고 나름 흡족해하면서도 아쉬움을 느껴 생각해보니 케찹이 없었다. 소세지 부침에 케찹이 없다니! 심한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심한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나는 색이 닮아 흑맥주지만 맛이 닮아 흑맥주는 슬프게도 아닌 자칭 흑맥주가 담긴 잔을 연거푸 비웠다. 늦은 오후의 그림자는 목을 길게 뻗어 마루 저 안쪽까지 들어왔다가 흔들흔들, 희미하게 흔들리면서 오늘의 세계를 떠나고 있었다, 또 내일을 기약하면서, 물론 비만 내리지 않는다면… 그리고 소세지 부침을 먹고 싶다는 소원을 빈 사람은 나름 흡족했는지 비닐 껍데기에 꽉 채워진 소세지 같은 표정을 하고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발그레한 뺨 색깔이 그렇게도 먹고 싶다는 소세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뭐에 취한겁니까, 소세지, 아니면 맥주? 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 by bluexmas | 2009/05/08 00:14 | Taste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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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소세지를 저렇게 이쁘게 써시는 법은 도대체 어디서 배우신 거에요.
하루 이틀 쌓인 내공이 아니신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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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가 양싸대기 백만번 맞은 굴욕감을 느낄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