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완주
, 부끄러워. 사실은 완주라고 말하기도 뭐한게 마지막 1마일 반 정도는 도저히 뛸 수가 없어서 걸었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처음 반쪽 마라톤을 뛰었을 때, 이 달리기라는게 폐활량이 아니고 근지구력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랫동안 운동을 못 했더니 막판에는 다리에 힘이 없어서 뛸 수가 없었다. 거의 쥐가 오르기 직전이기도 했고.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중간중간 기력을 보충하기 위한 보충제 등등을 보급한다고 들었었는데, 2마일마다 딸랑 물과 게토레이만 나눠주고 있었고 뭔가 나올 줄 알고 하나도 준비를 안 해간 나 같은 사람은 절반을 넘어가니까 배가 너무 고파서 뛰기가 힘들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재미없는 달리기였다. 게다가 며칠동안 비가 계속 내렸더니 소지품을 보관하는 천막 아래 바닥이 온통 축축해서, 끝나면 체온저하를 막기 위해 입으려고 준비해간 옷이 다 젖었고 따라서 덜덜 떨면서 집까지, 아니 차를 대어놓은 지하철역 주차장까지 와야만 했다(날씨가 3월 말이라고 할 수 없이 추웠는데 나는 그냥 반바지만 입고 뛰었다. 쫄쫄이를 입을 것을…). 뭐랄까, 겉으로 보기에는 티셔츠도 메달도 디자인이 잘 되어있고 뭔가 뽀대가 나 보이는 대회였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사람들 통제하는 것이나 코스 관리, 뭐 이런 것들이 전부 지난 번에 뛰었던 것보다 못해서 겉만 그럴싸한 대회구나, 라는 생각 밖에는 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결승점을 지난 다음 사진도 별로 안 찍고 짐만 얼른 찾아서 절뚝거리며 집에 돌아왔다. 달리기 하고 먹으라고 준비해 놓은 음식의 절반에는 High Fructose Corn Syrup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바나나와 땅콩, 사과 등등만을 미친 듯이 집어서 가방이 터질때까지 담아왔다.
그래도 코스 자체는 잘 짜놓아서, 누구의 말마따나 뛰면서 지난 7년간 살았던 도시를 회상하는 시간을 가져볼 뻔도 했지만, 워낙 준비가 안 된 상태여서 그런지 뛰기에만 급급해서 완주하고 나니 대체 어디를 뛰었던 것인지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 도시에 마지막으로 가지게 된 기억은, 망각… 뭐 뛰면서 지난 7년간의 기억을 회상하고 그랬다면 멋졌을 텐데, 그럴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아 #발, 이건 정말 생일날에 자가고문하는거 아니야? 라는 생각만 꾸역꾸역 들었다.
집에 와서는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추운데서 떨고 나니 뭔가 국물이 먹고 싶어서 된장찌개를 끓이고 삼겹살을 구워 맥주까지 곁들인 생일상 비스무리한 것을 차려 먹고는 잠이 들었다. 막 잠이 들려는데, 이 달리기랑 어쩌면 이곳에서 보낸 7년 동안의 시간이 비슷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하기는 했으나, 어디에서 무엇을 해서 어떤 것을 남겼는지는 모르고, 그냥 피곤하기만 한 것이.
# by bluexmas | 2009/03/30 08:56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