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불 짜리 귀향

그제 드디어 집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받아들었다. 표의 가격은 무려 2.5불. 그동안 쭉 대한항공만이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직항편을 운행해왔었는데, 작년인가부터 델타도 직항편을 운행하기 시작했고, 회사에서는 마일리지를 써서 표를 끊어줄테니 그걸 타고 가라고 얘기했다. 뭐 그런 사정이라면야 굳이 대한항공을 타고 가겠다고 고집할 이유가 없으니까… 솔직히 델타 따위 타고 열 다섯 시간도 넘는 비행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돈이 굳는다면야…

하지만 어이없었던 것은, 아예 처음부터 델타로 갈 수 있다면 마일리지를 쓸 수 있으니 그걸 알아보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더라면 표 가격따위를 알아보고, 또 그 알아본 가격을 회사에 알려주고 회사에서는 또 자기들 나름대로 알아보겠다고 하고, 또 그렇게 알아본 다음에도 쓸데 없는 것들로 메일을 주고 받는 등등의 과정을 생략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을, 그 과정을 거치느라 무려 2주도 넘는 시간을 버린 뒤, 결국 이른 아침 다시는 마주 대하고 싶지 않은 인사부사장(해고 통지와 서류를 건네준 사람-누가 또 마주 대하고 싶겠어? 웃으면서 자기에게 해고 통보를 한 사람을…)과의 삼자 통화까지 자다 말고 버벅-그 전날 이런저런 일들로 새벽까지 깨어있었기 때문에 잠이 모자란 상태여서…-거리는 영어로 해야만 했던 것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2.5 불짜리 비행기표로 이렇게까지 해야만 되겠어 정말?

어쨌든 나의 귀향이 2.5불 짜리라니, 가뜩이나 좋게 떠나는 것도 아닌데 고국에서 환영 따위 받지 못할 것 같다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너 비행기표 봐바… 뭐야, 2.5불? 그것도 표값도 아니고 세금이잖아? 우리나라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감히 2.5불 짜리 비행기표로 귀국하다니 너 따위는 환영할 수 없다… 뭐 이런.

아무래도 귀국 비행기 안에서 반성문이라도 써야되는 것일까? 아, 사실은 단 한 번이라도 비지니스 클래스 타고 보무도 당당히 귀향하는 꿈을 꾸어왔으나 경기마저 좋지 못해서 결국 만 7년간의 미국 생활을 이렇게 비참하게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조국의 품이 딱히 그리웠던 것은 아니나 이런 꼬라지가 되고 나니 기댈 곳이 없더라구요.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달랜 다음에는 열심히 살테니 그냥 받아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굽신굽신. 당분간 수입은 없을지 몰라도 실업 수당 따위는 청구하지 않을게요. 앞으로 살 동네에 작은 텃밭이 있다고 해서 거기다가 푸성귀나 키워서 캐 먹고 살 생각이거든요. 고기는 그동안 비만나라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 당분간은 먹고 싶지 않아질 것 같거든요… 그래도 지난 7년 동안 치열한 경쟁 속에서 머릿수 하나 정도 줄여왔던 기특한 과거를 참작해서라도 받아주셨으면…굽신굽신… 그래도 가기 전까지 예비군 훈련은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꾸준히 받아왔으니까… 굽신굽신.

비행시간이 열 다섯 시간 반이니까 이렇게 쓰면 한 스무 장은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 왜 지옥학창 시절에 뭔가 잘못한 애들한테 같은 반성문 하루에 스무 장씩 써서 내는 그 분위기로…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때 그런 걸 벌로 받은 애들 가운데 다른 애들을 돈 주고 사서 자기 반성문을 쓰라고 하는 애들도 있었는데.

어쨌든 나의 귀향은 2.5불 짜리 싸구려. 어디에서든 열렬히 환영 받는 삶 따위는 바라지 않았었지만, 그래도 이건 뭔가 께름직한 기분으로 살아왔던 지난 몇 년 간의 삶에 정점을 찍는 것과 같은 느낌이야. 10불이라도 했다면, 이런 기분은 아니었을텐데… 거기에다가 내가 회사에 청구할 추가 짐의 항공운임이 550불이라는 걸 알고 난 다음엔 더더욱. 나는 2.5불인데 내 짐은 550불이니까. 그러니까 짐이 나보다 220배 더 가치있으니까. 100배도 아니고 200배도 아닌, 무려 220배니까. 220… 대체 언제부터 내 삶은 나 자신보다 내 짐이 220배 더 가치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일까. 쓴 에스프레소를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기억을  더듬어봐도 대체 어디서부터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돌아가면 만날 사람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으니 내 소개 따위를 할 일도 없겠지만,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안녕하세요, 방금 7년 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제 짐보다 1/220 못한 가치로 인식된 박철수(가명)입니다’ 라고 해야 되나? 그렇지 않아도 떠나기 전에 문신이라도 하나 새길까 망설이고 있는데,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왼손등 같은데다가 1/220 이라고 새겨넣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누군가 물어보면 ‘아, 제가 7년 동안 미국에서 살다가 회사에서 정리되어 돌아오는데 제 비행기표값은 2.5불이고 짐값은 550불, 계산해보면 1/220…’

 by bluexmas | 2009/03/20 23:16 | Life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at 2009/03/21 21:4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3/22 13:00 

아니 뭐 어찌 되었든 돈 안들고 집에 가는 건 좋은 일이죠. 가뜩이나 돈 떨어져가는 이 마당에… Doves의 새 앨범은 언제 나오죠? 첫 곡을 홈페이지에서 들어봤는데 3집보다는 다르긴 해도 아주 크게 기대가 되지는 않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