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와
일자 평면을 가진 건물 셋이 같은 간격으로 가운데를 지르는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던 중학교 건물, 가운데 일자의 문간에는 ‘오늘의 영어’ 따위를 쓰는 칠판이 있었다. 그러니까 중학교 수준의 간단한 대화 한 마디씩, ‘Did you smoke the new weed yesterday?(어제 새로 들어온 거 피워 봤어?)’,’Yes, it was sick, for real(응, 그거 정말 죽여주던데).’ 와 같은 식으로.
그 일일 영어를 담당하는 영어 선생님은 송 뭐시기(이름도 기억하지만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라는 여선생님으로, 나이도 체형도,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조차도 딱 만화 주인공 호호 아줌마와 같아서 그렇게 불리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늘 그렇게 한마디씩의 회화가 칠판에 담기고 있었던 어느 날, 1교시인가 지나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세 번째 일자 건물에서 수업을 마친 호호 아줌마는 가운데 일자를 지나다가 눈을 보고는 어쩌면 그 아침에 수업에 들어가면서 썼을지도 모르는 그날의 영어 한마디를 쓱쓱 지우고 새로운 한마디를 써 넣었다. ‘Wow, it’s snowing!’ 이라고. 반쯤은 변성기를 거쳤고 또 반쯤은 거치지 않은, 그러나 모두들 그 호호아줌마보다는 머리 하나 쯤은 컸을 법한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그 한 자 한 자를 쓰는 선생님을 빙 둘러싸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학급일지를 가지러 교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눈이 왔다. 정말 눈이었다. 이 남쪽에, 그것도 3월 1일에. 이런 눈은 여기에서 지내는 이 길다면 길었을 시간을 보내는 동안 거의 처음이었다. 어제는 이 비가 마지막 겨울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눈으로 바뀌고 나니 아무런 생각도 없어져 창 밖을 그저 멍하니 바라 보고만 있었다. 이제는 지겹다 못해 싫어지고 있는 이 땅이 오늘만큼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어딘가처럼 느껴졌고, 오랫동안 까칠하기만 했던 마음도 조금 누그러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요즘 감출 여지조차 없이 까칠한 짐승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어쨌든 오랫만에 시규어 로스를 크게 틀어놓고, 햄버거를 구워 함께 먹었다. 오늘 하루 만큼은 내가 여기 아닌 다른 어느 곳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결국 나는 여기에서조차 도망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제는 감출 수 없게 되었다. 누구에게든, 또 어디에게든, 나는 익숙해지면 결국 도망치고 싶어질 것이다.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망조차 이제는 유효기간을 넘겨 바싹 말라가고 있는 요즘이지만, 오늘만큼은 좀 마음 편안하게 보내고 싶었다, 오늘만큼은.
# by bluexmas | 2009/03/02 10:36 | Life | 트랙백 | 덧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