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데이라는 이름의 헛지랄
집에 들어오면서 이것저것 사려고 수퍼마켓에 들렀는데, 계산대에서 내 뒤에 서 있는 동포로 보이는 남자아이(스물 댓살 정도?)가 손에 하트 모양 알루미늄 풍선 두어개와 역시 하트 모양의 양철 상자에 담긴 싸구려-가격이 아니라 맛이, 가격은 잘 모르지만 수퍼마켓에서 파는 미국산이라면 거의 100% 맛 없다. 모든 재료가 싸구려여서이기도 하고, 저온저속살균 우유로 만든 유럽산 초콜렛에 비해 미국산은 언제나 별로 맛이 없다- 초콜렛을 들고 있었다.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수퍼마켓에 들러서 사가지고 가는 모양이었다.
미국에 몇 년째 살면서 발렌타인 데이라는게 아주 없지는 않아도 또 그렇게 난리 역시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올해는 어째 느낌이 좀다르다. 어제는 집에 들어오는데 집 앞길 주유소에서 노점상 비슷하게 장미다발을 파는 것도 보았고,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쇼핑몰 옆의 서점에 가는 길도 굉장히 막혔다. 기억에 분명히 작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게다가 시내에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이런 걸 봤다면, 시내는 어땠을까 궁금했다.
뭐 발렌타인 데이가 초콜렛 팔아먹기 위해 일본에서 만든 거네 뭐네 이런 얘기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던 얘기니까 여기에 굳이 들먹이기도 재미없지만, 수퍼마켓에서 산 풍선 몇 개와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싸구려 초콜렛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이 정말 사랑인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 아이는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일까? 물어봤다면 미친놈이라고 그랬겠지. 아니 뭐 그렇다고 비싼 걸 사면 그 감정이 제대로 표현된다고 얘기하고 싶은게 아니라…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주려고 생각했던 것, 또 받는다고 기대했던 것이 그 정도 생각-응 수퍼마켓에 가서 사면 되겠지, 만나러 가기 전에…-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면 그 준비를 위한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 듯한 감정이 정말 그 ‘사랑’ 이라는게 맞을까, 뭐 그런. 그 남자아이가 그렇게 사랑을 하는지 안하는지 솔직히 거기엔 전혀 관심 없고, 그냥 사람들의 상황이나 감정이라는게 보편적으로 그런 것일까 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짝을 지을까? 돌아보면 아니었다고 생각되어서 자다가 말고 깨어나서 부끄러움을 느꼈던게 대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래도 저 정도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진 관계 같은 거라면 죽을때까지 이렇게 살게 될지언정 엮고 싶은 생각이 없다. 또한 사람로 하여금 그저 가게에서 손쉽게 집을 수 있는 걸로 그런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거라 믿게 만드는 상황을 조성하는 이 사회나 산업구조나 이런 것도 참…
어제 서울 시내에는 얼마나 많은 군함들, 초콜렛을 담은 군함들이 여자아이들의 손에서 남자아이들의 손으로 옮겨 들려서 떠다니고 있었을까?
뉴스나 신문 같은데 나오는 것처럼 ‘위 사진(혹은 영상)은 사건의 내용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와 조금 비슷한 상황이기는 한데 또 가져다가 붙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라서… 얼마전에 옛날 사진을 뒤지다가 찾았다. 어째 언젠가 어디엔가 올렸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상자에 얽힌 얘기는 이런데에 쓰기엔 얽혔던 사람에게 너무 예의 아닌 것 같아서 한 십 년은 더 기다려야 할 듯. 그때는 그래도 나름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수천년 지난 지금 보니까 아주 별 볼일 없네. 이것도 참 부끄럽구나.
# by bluexmas | 2009/02/15 13:19 | Life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