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일기 (16)- caution: explosive

애초에 성격이 그렇게 좋은 인간도 아닌데 별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 빠져 있다 보니 감정의 기복이 평소보다 심해지는 요즘, 엉뚱한 곳에 나의 이런 감정을 쏟아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도 싫지만, 그렇다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해서 엉뚱한 곳에다가 화풀이를 하는 건 더 싫다. 다급하거나 더 어려울수록 침착해져야 하고, 원칙에 엄하게 기대야만 한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러나 어제는 잠시 분노의 작은 폭발이 있었다. 받을 택배가 있었는데, 새벽에 배달 나갔다는 물건이 저녁 여섯 시가 다 되도록 배달되지 않았다. 급한 건 아니었지만 기다렸으니까, 다시 확인을 해 봤더니 엉뚱한 동네로 가는 트럭에 실려 하루 종일 헤매다가 주소를 찾을 수 없어 배달이 안 되었다고 나왔다. 혹시나 내가 주문을 할 때 주소를 잘못 넣었나 싶어서 확인해 봤더니 멀쩡했다. 드디어 폭발하는 분노. 하루를 더 기다릴 수 없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었다. 얘기했다시피 급한 게 아니니까. 그러나 제대로 배달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전화를 돌려야 하고, 또 상담원 연결을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뭐가 잘못 되었는지 설명을 하나하나 해줘야 한다. 내가 왜? 내 잘못인가? 내 잘못도 아닌데 뭔가 불편함을,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오면 아주 오랫동안 쌓여있던 분노가 폭발한다. 땅 밑에 길게 이어진 잔디의 뿌리를 잡아 뽑는 것과 같은 느낌. 뿌리는 생각보다 길어 계속해서 딸려 나오고, 또 생각보다 질겨서 단단하게 다져진 땅을 가르면서 끌려 나온다. 아, 이건 대체 생각보다 왜 이렇게 긴 거야.

늘 그렇듯이 상담원들은 닭장에 갇힌 닭 같은 느낌이다. 좁은 큐비클에 헤드폰을 쓰고 앉아서 알을 낳는 대신 말을 하겠지. 뭘 도와줄까? 응 미안해. 응, 미안해. 응, 미안하다고 했잖아. 뭘 더 해야 되는데 내가? 다들 마음은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겠지. 일 끝나고 마른 목을 축일 싸구려 버드와이저를 마실 동네 싸구려 바라거나, 허리 42인치의 바지를 파는 특대전문 옷가게라거나…… 어쨌거나 어디든 자기가 그 순간에 속해있지 않는 곳을.

이봐, 니들 전문간데 내 물건이 왜 여기에서 몇 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 있는건데? 응, 미안해. 뭐라고? 응, 미안하다고. 주소가 잘못 됐대. 주소 맞게 넣었는데? 응, 정말 미안해. 어떻게 가는지 길을 알려주면 내일 배달하라고 얘기할게. 니들 전문가잖아, 왜 내가 전문가한테 우리 집이 어디 있는지 알려줘야 되는데? 우리 집이 무슨 허허벌판 한 가운데나 산 꼭대기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응,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과할게.

……

좋겠다, 너희들은. 그렇게 마음도 안 주고 일할 수 있어서. 나 같으면 차라리 닭이 되는 길을 택하겠어. 알이나 낳을래, 그건 먹을 수나 있잖아… 앗 그러나 남자니까 수탉이 되면 어쩌지? 구글지도를 찾아 친절하게 위치를 설명해주고 나니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뭐 어쩌겠어, 이게 현실인데.

어쨌든 다시 career statement로 돌아가서, 이렇게 저렇게 고치면 좋겠고, 워드로 보내주면 내가 고쳐줄게, 문법이랑 구문이랑… 라고 아침에 답장이 왔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러나 스트레스는 여전하다. 결국 새벽 세 시까지 아무 것도 안 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전체적으로 다시 손을 봐서 체계를 잡아 메일을 보냈다. 그 때가 새벽 네 시. 한 시간이면 할 일을 왜 또 하루 종일 미루고 있었지? 끝내고 나니 또 멍해져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해가 뜰 때까지 앉아 있다가 잠을 청했다. 잠이 밀려 오면서 저녁 때 했던 말들이 깜빡깜빡, 저물어 가는 의식을 별똥별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의 이 상황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래서 어디로 나아갈지, 또 무엇이 될지…… 그래서 기대가 돼, 원하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내가 그렇게 원하던 변화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이제는 정말 내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게 아니면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남들처럼 살아야 된다는 강박관념도, 또 강박관념 따위 가지고 살고 싶지 않다는 강박관념도 벗어버리고 싶어, 터져버릴 것 같아, 딱 맞는 허물 아래의 내 몸이, 보여? 그 오랫동안 뒤집어 쓰고 살아왔던 허물과 그 아래 원하는 삶의 새 살 사이에 배어 나오고 있는 빨간 피가? 정답, 나는 A형. 핥아보니까 알 것 같아?

이른 새벽, 마음의 바닥에 짙게 깔려 있던 안개가 걷히는 것이 보였다. 이건 병이 아니고 나는 아프지 않다.

 by bluexmas | 2009/02/14 10:30 | Life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