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일기(5)
어제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느라 잠자리에 아주 늦게 들었는데, 어제 글에서 썼던 대로 정기검진 약속이 ‘있다고 믿고’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잠을 몇 시간 못 자서 짜증이 무럭무럭 났지만, ‘아 뭐 아직 회사 다니고 있다면 이 정도 짜증은 그냥 억눌렀을 텐데’ 라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다행스럽게도 월요일 도로 치고는 정말 한적했다. 나 같은 사람 많은가봐, 일요일처럼 한산하게? 라는 생각이 마음 속 가득…
어쨌던 병원에 도착해서 수속을 하고 비몽사몽간에 앉아 있는데, 오늘 내 이름으로 잡힌 정기검진 약속이 없단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제서야 아이폰을 뒤졌더니 약속은 내일이다. 나는 그냥 오늘 약속이 ‘있다고 믿은’ 것이었지. 순간 아득해졌다. 내가 지금 그렇게 정신이 없나, 오늘이 몇일인지도 모르고…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늘 그냥 검진을 받고 가라고, 병원에서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아니면 또 내일 아침 굶고 일찍 일어나서… 내일 어차피 회사에 마지막으로 들러 서류를 건네줘야 하기 때문에 시내에 내려가야 되기는 하지만, 직업도 없는데 막히는 도로를 뚫고 내려가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다. 하긴 뭐, 내일도 이렇게 실직자들 다 집에 있고 도로가 한적할지도 모르지, 월요일에도 이렇게 한가한데…
어쨌든 검사를 마치고 근처의 서점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에 아직도 드라이브에 저장되어 있을거라 믿고 있는 자료 때문에 IT 관계자들한테 메일을 보냈더니, 믿을 수 없게도 인사 담당자한테 답이 왔다. 아무래도 내 개인 메일이 필터링 되어서 정해진 사람들에게만 가거나, 아니면 모니터링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차단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쫙 끼칠뻔 했다. 개인 메일로 회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연락을 해야 되지 말아야 되겠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이것이 오늘의 작은 주먹, 또 한 방 때리고 지나가는…
애초에 가졌던 계획은 저녁때까지 공부하다가 운동을 하고 평소처럼 집에 들어오는 것이었는데, 변호사 사무실을 위시한 몇 군데에 급히 전화를 걸 일이 있어서 오후 세 시쯤 서점을 나섰다. 비도 내리고 날씨가 참 우중충한게 기분도 처지는 그런 날이었다. 어쨌든 집에 돌아와서 필요한 곳에 전화를 다 돌려봤는데 즐겁거나 들어줄만한 얘기는 별로 없었다. 이제 올 것이 오는 것일까, 그런 기분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뭐 다 안 잘 안 풀려서 돌아간다고 가정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 다 처리한다? 갑자기 안식처나 숨어있기 좋은 방처럼 언제나 느꼈던 집이 짐처럼, 또 그 집에 들어찬 많고 많은 가구며 물건 등등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것들은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될까? 생각하니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진작에 ‘될 대로 되라지’ 의 마음가짐으로 스스로를 중무장하는 법을 좀 잘 배워뒀어야 하는 건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어쨌든, 뭐가 되든지 간에 저녁때에는 낮에 스케치한대로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하기로. 머릿속에서 회사 개인 컴퓨터에 저장해 놓았던 수많은 이미지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만 지금 손에 있어도 포트폴리오 벌써 다 만들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 by bluexmas | 2009/02/03 07:36 | Life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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