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재난의 내막
아주 잠깐, 이런 얘기를 여기에서 써도 될까? 망설였다. 그러나 뭐, 이런 일 역시 내 삶의 일부가 아니었던가? 내가 무슨 죄 지은 이야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지난 목요일 부로 나는 많고 많은, 그래서 이제는 다수가 되어가는 것 같은 실업자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수요일, 면허 시험의 첫 번째 과목을 앞두고 나는 이런저런 일로 회사를 하루 쉬었다. 다음날 아침, 시험을 보러 가기 전에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회사 웹메일에 접속하려는데 접속이 되지 않았다. 바로 어제 아침에만 해도 되었는데? 어째 예감이 좋지 않았으나 사고 때문에 평소보다 더 막히는 도로를 뚫고 시험장까지 가서 말도 안 되는 시험을 치르느라 나는 그 사실을 곧 잊어버렸다.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 시험을 보고 나왔는데 막 울리는 전화… 회사 번호 가운데 하나여서 얼른 받았더니 내 개인번호를 알리 없는 보스의 전화였다. 할 얘기가 있으니 들어오라고… 그제서야 상기되는 아침 웹메일의 상황. 심각한 건가 보네? 묻는 나에게 그녀는 그냥 들어오라고만 했다. 아하, 올게 왔구나. 회사에 들어와보니 옆 자리 인도 여자애의 책상이 벌써 치워져 있었다. 나는, 벌써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고 건너편 자리의 서무보는 아줌마가 인사과에 가보라고 얘기하고는 나를 피해갔다.
그리고 나는 실업자가 되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이러한 상황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여러가지 이유로 회사에서 easy target이어왔으니까. 그러므로 생각보다 별 느낌이 없었고, 차라리 담담하거나 평안한 느낌이었다. 아, 이제 시간이 좀 남겠구나… 라는 생각에 얼마전부터 먹고 싶었던 잡채밥을 단골 중국집에 들러서 먹고, 바빠서 들르지 못했던 미장원에 들러 머리도 잘랐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라고 원장님이 얘기했고 나는 일이 일찍 끝났다고만 대답했다. 이렇게 일찍 일이 끝나면 뭐하세요? 그녀는 다시 물었고 나는, 그냥 집에 가서 쉬죠 뭐, 라고 대답했다. 대답처럼 나는 집에 곧장 돌아와 사람들 몇몇에게 메일을 쓰고 오는 길에 산 위스키와 맥주를 마시며 소파에 누워 졸다가, 해가 질때까지 잠이 들었다.
그렇게 내 실업자의 나날은 시작되었다.
내가 미국인이라면, 아마 지금 이 상태보다 더 걱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업자가 됨으로써 나는 이 낯선 땅에 합법적으로 머물 수단을 잃어버렸다. 곧 다시 직장을 찾거나 아니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직장을 찾을 확률은 극히 희박해 보이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 일단 끼니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 버텨야 된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때려줘서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울고 싶었다니까 라는 생각이 있었다. 회사에 지쳤고 또 일에 지친 상황이었고, 일 없는 회사 내 책상에 앉아있는 것도 마음 편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회의, 회사 자체에 대한 회의, 그리고 직업 자체에 대한 회의가 마음 속에 얼룩져 있어 원래 내 마음의 색깔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회사는 내 합법적인 체류의 자궁이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끊고 세상에 나가 볼까? 라고 생각하던 차에 탯줄은 스스로 나를 끊어내고 나의 독립을 종용했다. 그러면 뭐, 독립해주는 수 밖에. 당신 같은 엄마는 나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나도 모른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일단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최선을 다 하겠지만 앞으로 벌어지는 상황에 지금보다 훨씬 더 좌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뭐, 그렇다고 내가 죽거나 또 죽고 싶어질까? 그럴 상황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삶은 흘러간다. 그리고 나는 또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을 것이다. 이것보다 더 나쁜 상황도 넘겨왔으니까. 어쩌면 이젠 건축 따위 하고 싶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일단 밥이나 잘 챙겨 먹어야지.
아, 쓰고 나니까 이렇게 속 시원한 것을, 하하.
# by bluexmas | 2009/02/01 10:28 | Life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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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신 것처럼 건강부터 잘 챙기시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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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감사드려요. 어째 이 글은 하나하나 덧글 달기가 좀 힘들어서 이렇게 인사 드리니까 이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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