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헌혈
적십자 같은 데에서 일하면서 피를 뽑으러 다니면 걸어 다니는 사람 하나하나가 피의 샘처럼 보일까? 수도꼭지를 돌리듯이 핏줄에 두꺼운 바늘을 꼽으면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또 그걸 주머니에 담아서…
어쨌든, 꼭 6개월 만에 회사 건물로 피뽑기 팀이 찾아왔고, 어디 일부러 찾아가서 뽑아주지는 못해도 이런 기회엔 주저말고 바쳐야지, 라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통해 시간 예약까지 해서 찾아가 헌혈하고 왔다. 사실은 요즘 날씨가 계속 춥고 이래저래 잠을 많이 자지 못해왔기 때문에 몸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피 좀 뽑는다고 죽겠어, 라는 생각으로 그냥 밀어붙였다. 기본적으로 나는 건강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역시 다른 때보다는 조금 더 힘들었다. 기본 건강점검을 하던 흑인 남자는 체온이 좀 높다고 주의하라고 얘기했다.
사실 피를 뽑는다는 건, 계속해서 의식하면 약간 겁나는 행위이다. 의자에 꼼짝 않고 무방비상태로 앉아서 자신의 피가 빨려 나가는 걸 보고만 있어야 되니까. 누가 피주머니를 터뜨릴 수도 있고, 묶은 다음 계속 빨아낼 수도 있고, 갑자기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흡혈귀로 바뀌어서 나한테 꽂아놓은 관을 돌아가면서 빨아 마시고는 ‘야, 이 자식 보기보다 피맛 좀 나는데, 빨리 와서 식기 전에 빨아봐, 식으면 비린내 너무 많이 나서 맛없어’ 이럴지도 모르고… 날짜 예약을 해놓고 며칠 동안은 ‘의자에 묶여서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빨리면 어떻게 하지? 옛날옛적 비만이었을 때라면 한번쯤 쭈글쭈글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벌써 꽤 쭈글쭈글한데’ 따위의 멍청한 생각을 했었다. 몰랐었는데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어지는 케이트 베킨세일이 나와서 줄거리에도 무엇에도 상관없이 보는 Underworld 시리즈의 1편을 보면, ‘bleed dry’ 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게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빨아내는 것인 듯…
어쨌든, 지난 번의 경험을 살려 오늘은 아예 반팔을 입고 갔고, 처음부터 왼팔에서 뽑아 달라고 부탁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은 안 하는게 좋다고 그래서 그냥 달리기만 10km하고 왔다. 가지 말고 집에 들어가서 쉴까 후달리는데, 생각했지만 이렇게 후달릴 수록 스스로를 괴롭히는 재미는 짭짤하니까 그냥 가서 열심히 뛰었다. 이런 일 하면 누군가에게 어떻게라도 도움이 될까나. 어째 이런 거라도 해야 될 것 같아, 아니면 사람 구실 못 하는 것 같아서, 나만 편하게 사는 것 같아서.
# by bluexmas | 2009/01/22 11:19 | Life | 트랙백 | 덧글(4)
비공개 덧글입니다.
비공개 덧글입니다.
로이엔탈 님: 감기 걸리면 못 하나요? 몰랐어요. 좋은 일도 때가 있긴 하죠…
비공개 2님: 제가 강철, 쿨럭, 인간이라 10km, 쿨럭, 정도는 거뜬, 쿨럭, 해요. 지금, 쿨럭, 도 멀쩡, 쿨럭쿨럭, 하잖아요. T_T
요즘은 피를 학교 안에서도 뽑는군요. 마른 학생식당 밥 먹은 피가 뭐 쓸데 있다고… 아직도 거기 식당을 사랑방이라고 부르나요? 정체 모를 고기를 갈아 만든 돈까스나 잡채밥이 생각나네요. 사실은 그 옆 건물의 천원짜리 떡국 이런걸 좋아햇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