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까만색 액체/차 색깔 나는 설탕물

어떤 까만색 액체

작년 말 어느 날, 보온병에 담긴 까만색의 액체를 꿀꺽꿀꺽 마시다가 말고 지금 내가 이걸 왜 마시고 있는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액체의 이름은 커피라고, 누가 그랬다. 아, 그랬구나. 이게 커피라는 것이었구나…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는 알았던 것 같은데 마시다 보니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쨌거나 1월 1일 부터 나는 그 액체를 끊었다.

뭘 하든지 습관에 이끌려 가는 것만큼 싫은게 없다. 커피를 그렇게 마시고 있었다. 돌아보면 맛 보다는 카페인 때문에 마셨던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나야지, 라는 생각에서. 물론 홀푸드나 잘 가는 옛날 동네 커피는 맛있지만, 집에서 싸구려 그라인더로 갈아서 더 싸구려 미스터 커피 커피메이커로 내리는 커피는 정말 맛 없다(그리고 그것보다 더 맛 없는 커피의 바닥 1, 2위를 회사 커피와 델타 항공 기내 커피가 뒤다투어 가면서 차지하려고 매일 피터져라 싸운다. 앞다투어, 가 아니고 뒤다투어). 그런 걸 계속 이유도 없이 습관에 젖어 마시다 보니 내 자신이 갑자기 불쌍하거나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요즘은 커피를 끊고, 정말 뭔가 마시고 싶으면 차를 마신다. 책상서랍에는 3년 전인가 같이 일하던 중국애가 준, 진짜 중국에서 가져온 차가 있었다. 동그랗게 말려 있어서 뜨거운 물을 담은 컵에 던져 넣으면 퐁, 퐁, 소리를 내면서 가라앉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길게 펴진다. 그 퐁, 퐁, 하는 소리가 좋으므로 반드시 던져 넣어야만 한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면 그래도 잘 잤다는 느낌이 드는게, 아무래도 커피를 안 마셔서 그런 것 같다. 아무래도 촌놈기질은 버릴 수가 없어서 카페인에 내성이 생기지 않는 듯.

차 색깔 나는 설탕물

어제 회사에서 신문을 뒤지다가 티 라테 공짜쿠폰을 발견하고는 시식차 스타벅스를 찾았다. 블랙티 라테를 받아서는 한 모금 마셨는데, 달았다. 분명히 안 단 걸로 달라고 했는데… 회사로 돌아와서 1/3쯤 마시고는 이걸 다 마시면 얼마만큼의 칼로리를 섭취하는 걸까, 궁금해서 스타벅스의 홈페이지를 뒤져보니 200칼로리에 설탕이 24그램이나 들어있었다. 가장 작은 컵에 그만큼의 설탕이 들어있다면 코카콜라 한 캔에 든 설탕의 양과 맞먹는 상황.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내가 주문한 ‘unsweetened’ 라테가 사실은 스플렌다 같은 인공 감미료를 넣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구역질 나는 단맛이라니, 우웩. 바로 부엌에 가서 차를 쏟아 버리고, 남은 찻주머니를 물에 헹궈서 컵에 우려봤는데, 차맛과 향은 하나도 나지 않고, 오로지 그 스플렌다의 단맛만… 결국 쏟아 버리고 가지고 있던 차를 우렸는데, 어떻게 된게 또 색깔은 차 색깔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스타벅스에서 뭔가를 마시면서 커피를 마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 아 스타벅스 커피는 커피가 아니야, 콩을 너무 태워서 맛도 없고 프라푸치노 같은 것들은 설탕에 생크림 범벅이라 수백칼로리가 넘는데 어떻게 마셔? 라고 얘기하면 저런 까다로운 새끼, 그래 너는 홀푸드 가서  공정무역 인증받은 유기콩 커피 사서 너 혼자 갈아 내려 쳐 마셔라, 아니 왜 콩도 집에서 볶지 그러니? 커피콩 키우라고는 얘기 안 할께, 아무래도 기후조건이 다르니까 라고 닦아 세운다. 그리고는 설탕이 24그램이나 들어간 차 색깔 나는 설탕물이랑 버터 대신 플라스틱을 녹여 틀에 부어 만든 음식물 모형 같은 스콘 같은 걸 먹으면서 뭔가 ‘아 난 너무 바빠서 아침을 집에서 먹을 시간이 없으니 이렇게 걸어다니면서 한 손엔 차 색깔 나는 설탕물, 다른 한 손엔 플라스틱을 닮은 스콘을 들고 다니면서 먹으면 뭔가 열심히 일하는 도시의 직장인 같이 보일지도 몰라’ 라고 생각할지도(소위 외국물 먹고 왔다는 동포들 가운데 이런 얘기를 하면서 무슨 향수 따위에 젖는 사람들을 본 적 있다. 뭐 맨하탄 길거리에서 50센트짜리 커피를 손에 들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나와 또 도시인들이 어쩌구… 맨하탄에서 50센트짜리 커피가 커피일지 아니면 먹지-아, 오랫만에 입에 담아보는 이 단어, 먹지. 왜 영수증 뒷면 같은데 있는, 글씨 쓰면 뒤에 배겨서 똑같이 써지는…-를 우려낸 물일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참, 스타벅스 같은데 가면 나보다 10센티미터 작고 30킬로그램은 더 나갈 것 같은 누군가-남녀 불문, 그러나 사실은 여자가 더 많다…-가 ‘무지방 우유와 인공감미료를 넣은 모카 프라푸치노 Unsweetened Non Fat Mocha Frappuccino ‘ 따위를 시키는 걸 거의 언제나 볼 수 있는데, 가끔은 그 사람들 머릿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아, 저지방 우유랑 인공감미료를 넣었으니 이걸 먹어도 별로 살은 안 찔거야, 이러면 살이 빠질거야, 그래도 이건 먹어줘야…’ 뭐 이런 생각인 걸까. 가끔 그런 음료수 큰 컵(Venti 정도? 몰랐는데 Venti가 이탈리아어로 ’20’ 이고 그 컵이 20 온스들이라서…)을 들고 회사 로비에서 딱 한 층을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5분씩 기다리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그러니까 그거 사러 길 건너 스타벅스까지 3분 걸어갔다 오니까 너무 힘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탈 수 밖에 없는거지, 한 층 올라가려고. 대학시절 1호선 타고 통학하면 꼭 관악산 같은데에서 하루 종일 등산하고 온 아줌마들이 어떻게든 자리 차지해서 앉으려는 걸 보고, 아니 하루 종일 등산할 체력은 있고 지하철 30분 서서 갈 체력은 없나? 라고 의아해했는데, 차라리 그건 정말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그래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 연말연시용 예쁜 빨간 컵은 몇 개 건져서 그나마 수확이라고. 파는 커피나 차 따위엔 관심없고, 그저 컵만 좋아한다니 나도 참.

 by bluexmas | 2009/01/15 14:20 | Life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at 2009/01/15 17:4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1/17 13:43 

하하, 저 알고 보면 굉장히 하드코어한 사람이에요. 곧 알게 되실 꺼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