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만 생각하는 마지막

사진의 가죽자켓을 처음 발견한 곳은, 아루스라는 덴마크의 작은 도시 백화점이었다. 아주 가끔 여행에서 아, 이건 정말 나보고 입으라고 만들어놓은 옷인가? 라고 생각되는 걸 찾을 때가 있다. 그럼 밥을 굶을 정도까지 무리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비교적 과감히 지갑을 연다. 재작년 말 삿포로를 갔을 때에는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직전 시간이나 때우려고 들어갔던 역 앞의 세이부 백화점 어느 옷가게에서 그렇지 않아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피코트를 찾았었다. 그러니까 몇 년 동안, 아 올 겨울에는 피코트를 한 벌 살까? 라고 생각을 했는데 정확하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이 없어서 사지 못하다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게 짠- 하고 나타나는 상황. 어쨌든 이 가죽자켓도 그런 종류였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디자인이 일단 마음에 들었지만, 갈색치고는 너무 색이 옅었다. 그래서 일단 물러났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 돌아가면 그동안 눈독 들였었던 제이크루의 자켓을 살까, 생각했던 참이었다.  사실 작년 전까지는 단 한 번도 가죽자켓을 입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일단 무겁기도 하고, 가죽자켓이라는 건 마초들이나 입는거라는 편견이 사실 있었으니까. 검정색 오토바이 자켓 같은(그러나 제이크루에서 봤던 것도 바로 그 오토바이 자켓이었다)…

며칠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 자켓과 다시 마주한 건, 여행의 마지막 날 오후 코펜하겐에서였다. 그 동네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백화점인 일룸 Illum에 들렀는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랫쪽의 주머니가 웃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은 백화점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몇 번을 들락거리며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내 치수로 검정색도 있었다면 더 망설였을텐데, 다행스럽게도 다 나갔다고 했다.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백화점이 문 닫기 30분 전에 질렀다. 유럽에는 관광객들에게 면세혜택을 주어서 공항에서 수속을 하고 돌아왔으나 어찌 된 일인지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돌아와서는 찬바람이 불 때까지 가끔 입어보면서 아, 아랫주머니 정말 멍청한데 괜히 샀나? 라는 생각에 괴로울 때가 많았는데, 막상 입고 밖에 나가니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했다. 내가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게 민망할 정도로. 다들 한 번씩 입어보려고 하고… 이걸 입고 친구들을 만난 금요일에도,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구가 같이 술을 마시다가 집에 가기 전에 화장실에 간 사이에 의자에 걸어놓았던 이 자켓을 입고 도망치려고 하던 참이었다. 다시 빼앗아서 입고는 술집을 나서려는데 자켓에 넣어두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열쇠가 어디에도 없었다. 차를 근처 주택가 골목에 대고는 분명히 열쇠로 잠그-내 차는 좀 꼻아서 리모콘이 없다-고는 주머니에 넣어두었을 텐데… 친구들에게 열쇠가 없으니 바닥을 들여다 보라고 얘기를 했지만 다들 술에 얼큰하게 취해서 들은척 만척,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차로 향해서 주변의 어두운 길거리를 열심히 뒤져봤으나 거기에 열쇠가 있을 수도 없고… 결국 이런 때를 대비해서 회원에 가입해 있던 AAA의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해서 열쇠쟁이를 불러달라고 요청을 하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다시 술집으로 돌아와서 바닥에 눈을 깔고 있다가 그 전에 자켓을 빼았아 입은 친구가 앉은 의자의 바닥에 떨어져 있던 열쇠를 발견했다. 결국 그 녀석이 입어보았을 때 열쇠가 떨어진 것이었을텐데 대부분의 미국애들이 그렇듯 절대 책임 회피… 어쨌든 나는 얼른 AAA의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해서 서비스 취소를 하고, 아 다음부터는 얘들이랑 술 마시기 싫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째 쓰고 나니까 엄청나게 재미 없는 얘기 같잖아.

 by bluexmas | 2009/01/12 07:31 | Life | 트랙백 | 덧글(5)

 Commented at 2009/01/12 10:4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1984 at 2009/01/12 14:41 

아, 제게도 괜찮은 가죽자켓이 있었는데요.

여행할 때 분실했다는 슬픈 전설이.

의외로 마구 입으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나요? 후하하.

저는 아무 때나 입는 편이었는데, 친구들이 항상 ‘오!’ 했던 기억이.

별 거 없는데. 흠.

 Commented by 모조 at 2009/01/12 15:26  

와 가죽자켓! 입으시면 간지폭풍….이신거 아닙니까 ^^?

 Commented by basic at 2009/01/13 06:18 

저런 색상은 아무나 소화시키기 힘든데 오오오. 멋져요. 근데 마지막에. 다음에는 얘들이랑 술마시기 싫을 것 같다.는 말 엄청 공감되네요. ;;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1/13 14:55 

비공개님: 옷만 멋있는거에요^^ 입으면 별로에요 주인이 구려서 T_T

1984님: 아쉽네요! 전 여행에는 구린 옷만 가져가요. 입고 그냥 버려도 되는 것만요. 그래서 사진을 안 찍죠 노숙자 같아 보여서…

모조님: 와 가죽자켓! 입으면 간지 폭풍은 커녕 간지 봄바람도 안 나옵니다요 T_T

basic님: 색깔이 좀 그렇죠… 그래서 저도 조금 아쉬운데 그냥 독특한 맛에 입고 그래요. 친구들은 글쎄 이젠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