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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뭔지도 모르면서 인연일지도 모른다고 감히 믿었던 사람이 있었다. 몇 번의 12월 25일을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그 날이면 밖에 나가는 것도 싫어했고,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가는 건 더더욱 싫어했다. 그러나 그런게 싫다고 해서 딱히 갈 데도 없었으므로, 그와 나는 그런 날 그런 사람들끼리 만나서 시간을 보내리라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고, 그는 집에 거의 다 왔을때쯤에서야 생각났다는 듯 무슨 일이 있었던건데요? 라고 묻곤 했다. 나는 그럴때마다 그냥 잘 들어가요, 라고 인사만을 건넸다. 그렇게 두 번, 아니면 세 번의 12월 25일을 보내고 나서 나는 스스로가 인연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인연이라고 믿었던 건 개인사가 되어서 기록에만 남게 되었다. 그가 아직도 궁금하게 생각할지, 나도 살짝 궁금하다. 물론 말해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올해까지는.

어제 아침, 회사에서는 연례행사인 전체 모임이 있었고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첫 해를 빼고서 나는 그 모임에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두 번째 해에는 그 날 바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 전까지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는 녀석과 회사 앞 바에서 낮술도 아닌 아침술을 벌컥벌컥 들이키고서는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서 공항까지 가는 30분 동안 방광이 터지는 듯한 고통을 경험했고, 작년에는 서울에 있었다. 이건 거의 나의 습관이자 병인데, 나는 그런 모임에 발을 들여 놓을때마다 내가 거기에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그래서 올해는 사람들이 다 내려갈 때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다가 돌아와서는 책상에 잠시 앉아 글을 하나 쓰고는 M선배와 함께 회사를 나섰다. 내가 연말이라고 포도주를 한 병 선물했으므로 그는 점심을 산다고 했고, 우리는 중국집에 앉아서 라조새우와 짜장면을 먹으며 다른 사람의 험담을 나눴다. 중국집과 그의 집은 멀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를 집까지 모시고 갔다. 단지 어귀에서 그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또 덕분에 편하게 집에 왔구만, 이라고 한마디 툭 던졌는데, 그게 그의 고맙다, 는 인사였으므로 나는 아 뭐 연말인데 그런 것도 있어야지.. 라고 맞받아치고 그를 마중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그도 미안하다, 고맙다 뭐 이런 얘기를 잘 못한다. 왜 못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돌아보면 나도 잘 못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어쨌든, 그래도 그만하면 그의 의사표현은 훌륭하다고 난 생각했다. 그런 말조차 건네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까. 굳이 말 안 해도 사실 마음을 아는 상황도 많이 있으니까, 그 정도면 뭐.

회사에선 누군가 집에서 만든 오렌지 마말레이드를 한 병, 선물이라고 건넸다. 내가 쿠키를 돌렸으므로 답례라고 준 것이었다. 그래도 수십개 돌리면 하나나 둘은 돌아오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내가 뭘 바라고 주었을리는 없다. 그때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성격상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이런 것 잘 못한다. 그걸 생각하느니 그냥 사람 수대로 꾸역꾸역 만들어서 생각없이 주는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니까. 게다가 나는 언제나 그 못 받는 사람의 입장에 처했던 기억이 많다고 생각해서, 내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그러니까 어떻게든 악역은 되고 싶지 않은 강박관념 따위-도 있고, 뭐 그런 조금은 복잡한… 어쨌든, 그런 거 하나면 마음이 행복하다. 때 맞춰 날아온 카드 몇 장, 뭐 그런, 집에서 만든 소박한 선물… 마음을 알면 되는 것들. 올해는 사실 주는데 목표가 있어서, 회사 건물 청소부나 기사, 경비 뭐 이런 사람들한테 꼭 뭔가 주고 싶었는데, 비상용으로 만들어두었던 초콜렛 칩 쿠키 반죽까지 탈탈 털어서 모두에게 돌렸다. 단 한 사람, 퇴근하고 오는 청소부가 있는데 어제 일찍 도망쳤으니까 줄 기회가… 아마도 다음 주에.

누군가 또 물었다. 12월 25일에 혼자 있으면… 나는 그냥 할 일이 많다고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외로움, 이라고 생각한다.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 상황이 일차적인 외로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언제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누군가와 물리적으로’만’ 같이 있는 상황이 저 속 깊은 곳에서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외로움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예상외로 많다. 언젠가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서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사람이 옆에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혼자 있는 것이 덜 외롭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어져서 그럴지도 모른다. 혼자=외로움,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기까지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냥 어쨌든 누군가와 같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아서, 자신을 혼자 남겨두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혼자 있게 될 때 자신이 편안하게 느낄지, 아니면 정말 더 외롭게 느낄지 그걸 모른다. 그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상황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은 할 일도 많다. 날씨는 12월 25일 답지 않게 따뜻하다. 눈이고 선물이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조용히 머무를 수 있으면 그만이다. 올해는 이루고 싶은 것들 그래도 거의 다 이뤄서 욕심이 없다.

 by bluexmas | 2008/12/26 10:08 | Life | 트랙백 | 덧글(3)

 Commented at 2008/12/27 15:1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12/28 05: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12/28 16:30 

비공개 1님: 푹 자는 것만이야말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축하하는 방법이 아닐까요! 언제나 생각하기를 그런 날 전후에 눈이 맞게 되는 것도 분위기에 휩쓸리는게 아닐까 싶어서…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또 저는 그런 것도 없구요, 흐흑. 차라리 연애나 해보고 헤어지면 괜찮은데 저는 그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비공개 2님: I haven’t yet. Wish everything is alright with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