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전화
어제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 막 잠을 청하려는데 기억에 없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잠깐 망설이다가 받았는데, 그였다. 내가 전화번호를 바꾼지가 벌써 3년도 넘었으니 그가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아냈는지 궁금했지만, 그걸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비난과 조롱을섞은 말투로, 글을 쓴답시고 블로그 따위를 만들어서는 자기와 관련된 얘기를 쓰니 당신은 예전보다 더 찌질해진 것 같다고 나를 몰아붙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정말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고 싶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으므로 나는 바로 전화회사에 번호 변경을 요청하고는 침대에 누웠다. 전화를 먼저 걸어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므로 통화기록은 바로 지웠다. 다음 달 고지서에 전화번호가 찍혀 나올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전화를 먼저 걸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을 끄고 다시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바닥에 자빠져 있는 시계를 돌려보니 30분쯤 지나있었다. 어째 바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으므로 다시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블로그를 죽 훑어보았지만, 그가 그렇게 모르는 번호를 알 수 없는 경로로 찾아내어 전화를 걸어 따질만큼의 기억은 글의 어디에도 녹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글들을 다 읽었을리도 없다. 이렇게 저렇게 써온 글의 수가 800개에 다다르면, 쓴 사람조차도 어떤 생각에서 어떤 기억을 녹여 썼는지 바로 떠올릴 수 없는 글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물론 나 역시도 오래된 글들까지 하나하나 뒤져 대체 어떤 기억이 녹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나에겐 뭔가 쓸 때 그를 의식해야 될 의무 따위가 없었다. 그는 내 타인의 숲에서조차 육신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는 재로 내 숲의 공기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을 뿐이다. 태워 재를 날린지도 꽤나 긴 시간이 흘렀으니, 사실 이젠 공기 어딘가를 떠다닌다는 표현조차도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아마도 숲에 쌓여있는 사람들이 숨을 쉬다가 들이마셨겠지, 그래도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며 숨쉬는 그 숲의 공기에 대체 뭐가 섞여있는지도 모른채. 하긴,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도 맛나게 드셨다는 분이 계신데, 그까짓 재가 살짝 섞인 공기쯤이야 뭐 대수일까… 게다가 태워 날린 사람은 오직 그 한 사람 뿐이니 각자가 들이마신 재의 양도 미미한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한때는 나쁜 기억따위 전부 골라 긁어내어 태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 어쩌면 아직도 그럴지도. 사람은 사라져도, 기억은 늘 남아서 편두통과 같은 통증을 무시로 선사하면서 과거에 내렸던 잘못된 결정에 대한 응징을 가하니까. 그렇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불가능하는 걸 알게 되었다. 나에게 기억은 문신과 같다. 단지 피부처럼 보이는 곳에 새겨져 있지 않을 뿐이지, 어딘가에 벗겨낼 수 없는 상태로 자리잡고 있을테니까, 좋은 기억들과 얽힌 채로. 정녕 없애고 싶다면 그때는 껍데기를 홀랑 벗겨내는 선택만이 존재할 뿐이다. 언젠가는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던, 빽빽하게 들어찬 상자속의 면도날 몇 개를 꺼내어서는 나쁜 기억만 살짝 벗겨낼 수 있는지 시도해본 적도 있었다. 물론 실패했고, 멀쩡하게 젊은 수건 두 장이 걸레라는 이름의 은퇴 생활을 맛보지도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그 뒤로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아갈 뿐이다. 때로 어차피 얘들도 죽을때까지 지니고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조금 더 사랑을 베풀어줘야 되나, 생각해보면서.
가끔, 누군가가 물어본다. 거기에 네가 그렇게 주절대는 얘기들은, 실제로 벌어진 일에 바탕한 것들이냐고. 사실은 나도 잘 모른다… 회사에 있을 때 나는 현실의 공기로 숨쉬지만, 회사 문 밖을 나서면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건 망상의 공기니까. 그런 망상의 공기 따위를 숨쉬면서 텅빈 집에 앉아 있노라면, 때로 만들어 낼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생각의 가지가 솟아 오른다. 가지의 뿌리가 발을 내리고 있는 땅은 언제나 경계가 모호한 기억의 영역이다. 그건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좋은, 그리고 나쁜 기억이 얽혀있는 영역일 수도 있고, 아예 존재했던 적조차 없는 가상현실의 영역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구분해 낼 능력이 없다. 나는 그저 쓸 뿐이고, 누가 물어보면 그저 얼버무릴 뿐이다. 같은 사람이 두 번 다시 물어보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그러나 누군가 또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짜로 전화를 받았냐고 ^_^;;;
# by bluexmas | 2008/12/19 16:32 | —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