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주말, 긴 월요일
늙어서 죽기 전에 삶의 10대 신비를 꼽아보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다른 건 몰라도 주말이 짧게 느껴지고 월요일이 길게 느껴지는 것만은 바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짧게 느껴지는 주말에 뭘 했냐면… 전날 밤에 만두속 만든답시고 난리치다 늦게 자는 바람에 열 한 시가 다 되어서 일어나서는 극장에서 Role Model(Judd Apatow풍의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라면 강추!)을 보고 근처 월남 국수집에서 쌀국수로 점심을 때운다음 노트북을 들고 서점에 가서 앉아있다가 왔다. 설마했는데 노트북을 오랫만에 켜 보니 전지가 한 시간 분량 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그 남은 한 시간 동안 군대시절 1분에 1,000타를 치던 실력을 발휘, 생각나는대로 아무거나 쓴 다음 집에 돌아왔다. 결국 집에는 다섯 시엔가 돌아와서는 만두를 만든다고 난리를 친 덕분에 저녁은 아홉시가 넘어서야 먹게 되었다. 만두에게 잡아먹힌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 6개월 내에 만두 또 만들겠다고 말 꺼내면 내가 사람이 아닐지도…
일요일엔 일찍 일어나서 아침 먹고 16km 달리기를 한 다음에 집에 들어와서 느긋하게 점심먹고 미식축구나 봐야지… 라는 생각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주말 늦잠병이 도져서 일어나니까 열 한 시였다. 결국 아침 먹고 한 시 부터 시작하는 미식축구를 틀어놓고 그동안 못 다린 셔츠를 한 열 장 가까이 다림질해놓고, 부엌 바닥을 청소한 뒤 오랫만에 3차원 모델링 연습을 좀 했다. 물론 학부때에도 적당히 손은 댈 수 있었지만, 대학원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3차원 모델링을 익히려 했던 이유는 뭐 요즘 추세에 당연히 해야되는 것이니까 했던 게 사실이긴 해도 나에게 애초에 모자란 공간지각능력을 좀 보충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는데, 그렇게 익힌 모델링을 회사에서는 전혀 쓸 일이 없었고 그렇게 4년 가까이 지나는 사이에 나는 모델링을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이 되고 또 나 스스로도 옛날에 익혔던 기술들이 녹슬어서 어디에서 모델링 할 줄 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고… 사실 모델링 하나 안 하나 나에겐 별 상관이 없는데, 알고보니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3차원 모델링의 기초 지식마저도 없어서 회사에선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이기도 하고 나 역시 내가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내가 생각하는, 이 아닌)’ 일의 범위를 이젠 좀 더 늘려놓아야 할 것도 같고… 간만에 회사보다 여러모로 체계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일 비슷한 걸 하려니, 그것도 월요일이 슬슬 다가오는 걸 느끼는 일요일 오후에, 스트레스를 좀 받기는 했지만 두어시간 들여서 엉성한 걸 만들어서는 J에게 메일로 날렸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일도 이젠 좀 해야될 것 같다고 필요를 느껴서 이런 걸 좀 해 봤으니 보고 얘기하자… 뭐 그런. 사실 지난 4년 동안 회사에서 3차원 모델링을 하도록 여건을 가져왔던 애들과는 이제 너무 숙련도가 떨어지는 걸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도 걱정이 좀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 컴퓨터를 몇 시간 쓰고 나서는 공원에 나가서 16km 달리기를 했다. 반환점을 돌고 나서 약간 무리를 한 탓에 마지막 5km가 좀 버거웠지만 잘 조절하면 다음 주말엔 18 km로 한 번 늘려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젠 뛰기 전에 얼마를 뛰어야 한다, 를 미리 생각하면 뛰기 어려워지는 거리에 이르고 있다. 반환점 돌고 나서는 결국 몸보다는 정신이 뛴다는 기분이 든다. 한 시간 이십 분인가 걸려 다 뛰고 나니 여섯시 반도 안 되었는데 해가 지고 있어서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그러므로 주말도 끝.
지난 주로 일단 큰 마감은 넘겼지만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해야된다. 이러저러-물론 여기에 쓸 수 없는-한 사정으로 당분간은 야근을 절대 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와서 신나는 마음으로 만들어야 되는 책 디자인 아이디어를 몇 가지 만들어서 윗사람들한테 보여줬는데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생각했으나 어떻게든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관철시키려는 지독한 인도애들이 계속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열심히 일하고 반응도 좋아서 전체적으로 좋은 분위기였던 월요일의 마무리가 약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얘기도 길어져서 결국 퇴근은 여섯시 반,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홉시 반… 운동도 했겠다, 배도 고프겠다, 이런 날은 집으로 운전해서 돌아오는 길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그제서야 저녁을 먹고 나니 피곤해서 그냥 자버렸으면 좋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해야될 일들이 있어서 아직까지도 이렇게 하품만 해대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주말에 새로 산 커피랑 씨디 몇 장으로 어떻게든 추수감사절까지 이 지겨운 일상을 버텨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추수감사절 연휴때까지는.
# by bluexmas | 2008/11/11 14:34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