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식가면
어제 드디어 두 번재 냉장고가 배달되었다. 몇 달을 벼르고 또 벼르다가 질러버린 냉장고를 차고에 들여놓고 나니 마음이 흐뭇했다. 이 냉장고는 온전히 가식가면을 보관하기 위해서 산 것이다. 정말 오랫동안 가면들을 음식 냉장고에 같이 보관해왔었는데, 일단 늘어나는 가면들 때문에 공간이 부족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보다 가면에 김치냄새가 배는 것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지 벌써 오래였던지라, 몬타나에 창고를 둔 온라인 매장에서 12개월 할부로 질러버리고 나니 많은 걱정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렸다.
가면들은 늘 차가운 곳에 보관해야만 한다고 오랫동안 나를 끌어주신 두 분 가식선생님께서는 강조해오셨었다. 무엇보다 가면이 아주 얼굴에 달라붙으면 안 되니까, 라는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래도 집에서는 잠깐이나마 가면을 벗어두고 얼굴에 휴식을 좀 줘야지, 그래야 다음날 아침에 다시 가면을 써도 가면도 생생, 얼굴도 생생, 이라고 말씀하셨던 남자선생님, 그 분은 조직에서의 아주 빠른 승진이 무엇보다도 가면의 덕이어왔다고, 본인의 능력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안 하는 겸양의 미덕을 늘 발휘해주셨기 때문에 스승으로 모시는 나의 마음도 언제나 흐뭇했었다. 그러나 댁에서조차 가면을 안 벗으시는 듯한 모습을 종종 보아왔던 나로써는 무엇보다 선생님의 피부 건강이 염려스러웠는데, 지금도 역시 승승장구 잘 지내시는지 정말 궁금하다. 올해 스승의 날에도 누가 될까봐 연락을 안 드렸는데 내년엔 나의 여건이 좀 허락할까… 선생님의 배움없이 홀로서기를 선언한지도 거의 4년이 되어가고 있지만 가르침대로 열심히 가면을 써도 나에겐 승승장구, 가 터지지 않아서 걱정이 많이 되는 요즘이다. 스승님의 제자로써 정말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되는데.
또 다른 선생님은 여선생님이신데 이 분 역시 조직생활을 아주 젊은 나이-나보다 한 살이 더 많으셨던가?-에도 비해 참으로 오래하셔서 그에 맞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는데, 단 한 번도 가면의 존재나 용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셔서 그게 오히려 인상에 더 강하게 남았다. 그냥 몸으로 보여주셨었다고나 할까… 짧지만 집중적이었던 배움의 기간을 마치고 선생님 곁을 떠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가면을 절대 벗으신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옛날에는 집에서 가면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요즘같은 대량생산 및 온라인 시대에 시간을 들여서 가면을 손수 만드는 것도 너무 번거롭고 해서 인터넷을 통해 가면을 주문할 수 있게 된지도 꽤나 오래 되었는데, 이 경우 얼굴에 피부처럼 잘 맞는 가면을 맞추기 위해 데드마스크를 떠서 택배로 보내야만 한다. 가족이 있으면 도움을 받으면 되지만 나는 가족이 없으므로 토요일 아침에 멕시코인들이 일당벌이를 위해 나가는 동네에 가서 한 명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다. 한 시간에 10불이면 쓸 수 있는 사람을 50불을 주고 두 시간을 썼지만 그렇게 만든 데드마스크를 바탕으로 만든 가면들은 역시 얼굴에 잘 맞아 만족스러웠다. 일단 한 번만 마스크를 떠서 보내면 그 다음에는 원하는 가식의 정도에 따른 두께만 입력하면 되므로 여러모로 편리하다. 물론 부분가면을 맞추는 것 역시 가능하다. 오랜 가면착용으로 인한 피부의 빠른 노화 등등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표정관리에 가장 중요한 눈이나 입의 부분가면만을 맞추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부분 가면을 쓸 경우에는 가면이 씌워진 부분만 불균형적으로 웃어서 오히려 가식인 티를 내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전날 지나친 과음 등등으로 피부가 아주 나쁜 경우를 위한 비상용을 몇 개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는게 현실이다.
피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가식가면을 쓰는 건 피부만을 놓고 볼 때는 정말 힘든일이다.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집에 와서 가면을 벗으면 피부가 엄청나게 말라있음을 느끼니까. 그래서 자기 전에는 늘 시간을 많이 들여 수분 크림을 듬뿍 발라줘야만 한다. 무엇보다 남자는 남자피부에 맞는 제품을 써야만 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맞는 크림을 찾느라 시간을 좀 들였지만 이걸 찾아낸 다음부터는 원체 건조한 피부에 가면을 씀으로써 더해지는 건조함과 조기노화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가면을 쓰고 다님으로써 얻는 반사이익이 워낙 크기 때문에 그 정도 피부학대는 무시할 수 있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참으로 오랫동안 내가 표정관리를 못해서 얼마나 많은 손해를 입었던가… 원래 세상은 공정한 덩어리가 아닌데도 나는 늘 이상적으로라도 공정해야된다는 생각을 다 같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 고집덕에 조금이라도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접하게 되면 말보다, 몸짓보다 표정이 먼저 일그러지곤 했고, 그런 나를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싫어했던가, 재수없게 혼자만 잘난척, 고고한척 한다고. 참 어린 스물 몇 살, 군대에 있을 때 가면이 있었더라면 삶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을 것을…
어쨌든 차고의 냉장고, 가면 전용 냉장고에는 온갖 두께의 가면들이 가득하다. 처음에 선생님들 곁을 떠날 때에는 가면을 통한 나의 가식수준을 잃을까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웬걸 미국이라는 나라엔 선택의 폭이 한층, 아니 두층 이상 더 넓었다. 거기에다가 감정을 덜 싣고 말할 수 있는 남의 나라 말, 영어를 더 많이 쓰게 되면서 나는 서로 다른 감정 시스템을 통한 가식을 쓰는데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돌아보면 가장 두꺼운 가면을 쓰고 최고의 가식을 부린 순간들은 전부 이 곳에 온 뒤에 벌어진 것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디션때마다 개인기록을 갱신하곤 했지만, 이 곳에서 벌어진 회사의 면접이나, 그 면접으로 회사에 들어온 뒤 사람들과 맞닥뜨리면서 부린 영어 가식들은 우리나라의 오디션 가식등등과는 비교 자체조차 불가능한, 스테로이드의 힘을 빌린 가식들이었다.
그리하여 혼자 밥이나 간신히 끓여먹고 근근히 유지해가는 직장생활, 바쁜 와중에 허둥거리다가 도시락을 못 챙겨가는 한이 있어서 가면은 꼭 챙기는게 요즘의 추세다. 아예 전날 밤, 다음 날의 상황을 미리 생각한 뒤 쓸 가면을 골라 맨 앞줄에 놓아둔다. 사실 차고에다가 가면냉장고를 둔 이유도 단순히 공간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모든 준비를 다 마친 뒤 가면을 꺼내 쓰고 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되니까. 그리하여 가뜩이나 경제 사정도 안 좋은 이 마당에 12개월 할부씩이나 해서 가면전용냉장고를 사서는, 김치냄새도 더 이상 나지 않는 차갑고 신선한 느낌의 가면을 쓰면서 나는 가면에게 기도 아닌 기도를 바친다. 가면이여, 가식으로 나를 이끌어 주기를,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무슨 야심만만한 인간처럼 높은 지위나 그에 부록처럼 딸려오는 명예나 부 따위는 원하지도 않아. 그냥 밥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면 되니까… 낮에는 그렇게 회사에서 버텨내고 저녁이면 집에 돌아와 두꺼운 너를 벗어놓고 이렇게 되도 않는 글이나마 계속 쓸 수 있을 정도로만 살 수 있게. 그렇게 기도가 끝나면 나는 차를 몰아 집을 나선다. 그러면서 늘 생각한다, 혼자 살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누군가와 함께 살았다면 나는 밤에도 가면을 벗지 못했을테고, 그렇게 가면을 오랫동안 벗지 못하면 피부노화를 걱정하기 전에 얼굴에 가면이 달라붙어 결국에는 자기가 지금 가식을 부리는지 아닌지조차도 알 수 없게될테니까. 죄송해요 선생님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선생님들만큼 성공에 목마르지 않아서인지 밤에는 가면을 벗고 좀 쉬고 싶더라구요. 오늘 아침, 유난히 차가 안 막혀 회사로 쌩쌩 달려내려가면서 간만에 쓴 유난히 두꺼운 가면을 쓴 나를 백미러로 바라보면서 웃는 연습을 해 보았다. 가면 뒤의 내 진짜 입은 움직일 필요조차 없었다. 가면은 처음부터 웃는 얼굴이었다.
# by bluexmas | 2008/11/07 13:36 | — | 트랙백 | 덧글(4)